운문과 산문

최승호<뭉게구름>외 4편

미송 2012. 1. 24. 23:13

    뭉게구름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

    만 할아버지가 구름을 이고 걷다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을

    이고 걷다가 사라졌으며 어머니는 구름을 이고 걷는 동안 늙으셨

    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는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내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

    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이고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변두리에서 올해도 아리따운 꽃들이 해와 달을 이고

    피었다 진다 말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가을이 오리라.

     

     

     

    두엄

     

    문명과 나의 관계는 시큰둥하고 권태롭다

    그래도 결별은 없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그 광고들의 난리 속에서

    내 피난처는 무심

    그래도 피로와 적의 속에서 늙는다

    어제는 턱수염에 흰 수염이 부쩍 늘어난 걸 발견했다

    이건 자연의 묘용(妙用)이고 일월(日月)이 흘러간다는 증거이며

    내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나는 강원도에서 죽고 싶다

    북춘천 우두벌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던 그 아지랑이

    향기치고는 좀

    역겨웠던 두엄 냄새

    산하대지의 두엄 더미로 육신이 두루 나누어질 때

    그때는 지렁이처럼 축축한 생각들도

    봄하늘 아지랑이로 나른하게 발효가 될까

    태양이 공병부대 긴 담장과 논두렁 위로 굴러가던

    북춘천

    우두벌의 그 아지랑이

    이웃집 바보처녀도

    두엄 냄새 속에서 괜히 침을 흘리며

    한적한 마을을 낮도깨비처럼 실실 웃고 돌아다니던....

     

     

     

     

     

    잠만 자는 인생

     

    하루도 인생이다

    그런데 사흘 내내 잠만 잤다

    온 천하의 괴로움을 다 잊은 채

    짚으로 엮은 개처럼 별으별 개꿈을 다 꾸면서

    잠만 잤다

    꿈속의

    사흘

    그게 과연 시간일까

    내 일대기인 영화를 되감아

    곱씹어보듯

    역겨움을 참으며 지난날을 뚫어지게 봤다

    지난날이란

    절대다

    뜯어고칠 수도 덧칠할 수도 없다

    썩은 한숨들

    빈 주전자는 타는 냄새를 풍기며

    나흘째 밤에는

    몸이 거인처럼 일어나더니

    지긋지긋한 그림자 같은 나를 뿌리쳤다

    그리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오래된 가풍

     

    참새 댓 마리

    이른 아침 구멍가게 앞에 내려앉았다

    과자 부스러기나 새우깡이라도 쪼아먹는 것일까

    누가 뭐해도 참새는 낙천가

    썩은 좁쌀을 먹어도 크게 비관하지 않는다

    선골도풍(仙骨道風)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시원하게 살다 간결하게 죽는 것이

    참새 집안의

    오래된 가풍

     

     

     

    검은 고양이

     

    쓰레기가 우리를 마주치게 했다

    그믐밤 어둠으로 빚은 듯한 검은 영물 

    고양이는 털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쓰레기자루 옆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구멍의 광채

    물질로만 말하자면

    해묵은 가죽자루인 나를 꿰뚫고

    업으로 말하자면

    불어난 오물덩어리인 나를 꿰뚫으면서 쏘아보던

    신비스런 광채

    이글거리던 불의 눈알

    物外의 일은 접어두고

    말하자면 그렇다

    비닐이 터지고 국물이 흘러내리는

    쓰레기자루 옆 고양이의 눈빛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금

    쓰레기 냄새 속에서 만나리라

    나는 들고 있던 쓰레기자루를 집어던졌다

    물러나던 검은 영물,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지금은 별로 할 말이 없다

    이를테면 축축한 쓰레기의 힘으로 불어난

    고양이 가족의 근황

    어린 것들에게 오물을 먹이는

    대도시의 굶주림 이야기

    진척 없는 내 어두운 밤

    그믐의 진실 따위는

    글쎄,

    다음에나 말할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