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의 창살
잡범 징역 세 번 살며 배운 거라곤
내 밥그릇 두 개면
누구 하난 밥그릇이 없다는 것
내가 떡잠이면
누구 하난 새우잠이라는 것
낙하산 타고 들어온 놈 있어
세월 가도 왈왈이 되지 않는다는 것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지
도중에 그만두면 영원히 찌그러진다는 것
2
꿀잠
전남 여천군 소라면 쌍봉리 끝자락에 있는
남해화학 보수공장 현장에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들 있으리
삼 사십 분 눈붙임이지만, 그 맛
갈대밭 뭉그러뜨리는 영자의 그 짓보다 찰져
신문 쪼가리
석면 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지만
소혀처럼 따가운 햇볕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3
마지막 술집
간판이 없는 집
이층에 있던 집
지붕 없는 열댓 계단이 하늘로 이어지고
술을 시키면 주인은 한숨부터 쉬던 집
담배 연기가 동그랗게 말려 가던 집
내의자락 끌며 공동변소 다녀올 때면
그 합수냄새가 어쩔 땐 좋고
어쩔 땐 싫던 집
그 술집이 있던 동네, 길 가
공동수돗가에서 얼굴을 씻던 집
씻다보면 수채구멍 속 쥐 눈망울이 크고 맑던 집
키 낮은 집, 미닫이문 열면
바로 방이고 부엌이던 집
그 문 앞에 신발 늘 가지런하던 집
집 밖의 직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방 세 칸이 수도꼭지 하나 마주보고 있던 그 이층집
거기서 쌀도 씻고 오줌도 눟고 토도 하던 집
문밖에 철제캐비넷 하나씩은 다 갖고 있던 집
장롱 내어두고 거기에 닭도 키우고 개도 키우던 집
떼어 가면 만 원도 받고
오천 원도 받던 수은등 아래
전깃줄이 10차선 20차선으로 달리던
그 골목
거기에 살던 사람들
날일로 지방에 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던
미쟁이목수철근곰빵질통전기조적방통공구리덴죠닥트선반칠도배
또 한 삼 일은 보이고 한 이틀은 보이지 않던
빌어먹을룸펜쪼다머저리푼수개병쟁이백수얼치기칠푼이팔푼이들과
폐지수집을 다니던 영감
얼굴이 미역오리처럼 마르고 흰 버짐이 피던 계집애들
일식집 나가던 처녀 갈빗집 나가던 아줌마
집에서 부업으로 미싱을 밟고 구슬을 꿰던 사람들
혼자 산 할머니 혼자 사는 노총각
할머니와 둘이 살던 아이 아이와 둘이 살던 아부지
거기 거기, 밤이면 열심히 돈 없이
돈 버는 사업계획서를 짜던 아이
성당청년부 일을 하며 인사성 밝던 아이
이빨 사이로 침을 틱틱 뱉으며 삐끼집에 나가던 아이
가까운 공단에 다니던 아이
그러다 맑스도 읽던 아이
시를 짓고 유인물을 만들던 아이
우 몰려와 인생을 논하고 세상을 개탄하던 청년들
유인물 끼고 새벽에 나가던 청년들
그 청년들 잘 가던 이발소, 옆에
생선이 없던 생선가게, 옆에
거북선요 하면 거북선이 안 나오고
솔이 나오던 담배가게
어우러져 어우러져
이 모든 사람들 가끔은 들리던 술집
그 술집이 있던 닭장골목
그 골목 허물고 이제는 멋진 아파트,
기똥찬 아파트가 들어선다는데
나는 왜 이리 슬픈가 집을 잃은 아이처럼
버림받은 아이처럼
4
동네 이발소에서
어떻게 깎을 거냐는 말에
저번 머리가 참 좋더라 하자
가위질 소리
쉬엄쉬엄 백 번 들릴 게
째각째각 이백 번도 넘게 들린다
아저씨 담배 한 대 길게 하고
하품 두서너 번 할 동안도
주인아줌마 면도해주기
머리 감겨주기 말려주기
다 끝나지 않는다
흔쾌히 맞은 나를 시작으로
오늘의 성업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 나름의 축원이려니 하며
깜박 졸음 드는데
누가 내게도 다가와
아, 당신이 한 용접 참 튼실합디다
한 마디만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
5
손
버스 기다리는 척 벼룩시장이나 교차로를 슬쩍 뽑던 손
무담보 신용대출 854-2514 전봇대에 붙은 번호표를 몰래 뜯던 손
전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던 손
악수하기를 꺼리던 손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던 손
옹이가 박혀 있던 손
어이, 하며 저쪽 철골 위에서 환하게 흔들던 손
야, 임마, 하며 반가워 손아귀를 꽉 쥐던 손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
6
외상일기
셋방 부엌창 열고
샷시문 때리는 빗소리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오백 원어치의 아욱과
천 원어치 갱조개
매우 매운 삼백 원어치의 마늘 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라도 한 솥 가득 밥을 짓는다고 쓰고
외로운 날이면 꾹꾹 누른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덕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둔
뒷장에 쓰고, 바름이 아빠
소주 한 병에 참치캔 하나라고 쓴
앞장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는 쓰지 못하고
해방 평등이라고는 쓰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하루살이 날파리가 말라붙어 있는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쓰린 가슴 위에
쓰고 또 쓴다
눈물국에 아욱향
갱조개에 파뿌리
씀벅 나간 손끝
배어나온 따뜻한 피 위에
꾸물꾸물
쓰고 또 쓴다
7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또 뭐라고 써야 하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 추간판들을 위
로하면 될까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
제 중독으로
하루에 여덟 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간다는
모든 산재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
식당 아줌마, 중국집배달부, 퀵서비스, 가사노동
모든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에게도
180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도
영세농민에 불과한 농업노동자들에게도
산업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
산재보험을 적용해달라고 간구하면 될까
산재 민간감시원을, 산재요양 기간과 적용 범위를 좀더
늘려달라고
산재 주무기관을 좀더 민주화시켜달라고 청원하면 될까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써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가 아닐까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
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
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
산재에 물들어 있고, 보라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
숭숭 구멍뚫리고 있다
이 모든 산재를 보상하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이 모든 산재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
닳아진 무릎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을 모아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과 평화와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가장 악독한 산재,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고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
야 한다고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고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
8
너희가 누군지 그때 알았다
더 이상 오를 곳도
더 이상 내려갈 곳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쌓듯 망루를 쌓아갔던 열사들
그러니 일어나라
일어서서 이 치열한 새벽을 뜨거운 몸으로 증거하라
우리가 그대들이 되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더 이상 안주할 곳도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는
이명박 신자유주의 정책 폭력 살인
반민중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에 결연히 나서도록
살아서 비굴한 목숨이 아니라열사들의 영전에 자랑스런 이름들이 될 수 있도록
열사들이여 그 뜨거운 분노
그 뜨거운 함성 그 뜨거운 소망을 내려 놓지 마시라
9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
시를 쓸 수 없다
5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꽃이나 새나 나무에 기대
세사에 치우치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자리에만 앉으면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을 곳에서 목을 매단
이홍우 동지를 위해
겨울 바닷가 조선소 100m 공장 굴뚝에 올라
며칠째 굶으며 또 고공농성 중인 이들이 먼저 떠오르고
한 자라도 쓸라치면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생각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병원 안 성탄미사 자리에서 쫓겨나
병원 밖에서 눈물 시위를 하던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들의 눈물이 먼저
똑똑 떨어지고
한 줄이라도 나가볼라치면
1년 내내 삭발, 삼보일배, 고공농성
67일, 96일 단식을 하고서도
다시 초라하게 겨울바람 앞에 나앉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동지들의
한숨이 저만치 다음 줄을 밀어버리고
다시 생각해보자곤 일어나 돌아서면
그렇게 900일, 400일, 300일을 싸우던
KTX, 코스콤, GM대우, 재능교육 비정규직 동지들의 쓸쓸한 뒷모습
못 다 이룬 반쪽의 꿈을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랜드-뉴코아 동지들이 먼저 보이니
10
미안하다, 시야.
오늘도 광화문 청계광장 변에서 달달달 떨고 있는 시야
서울교육청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야
YTN 앞에서, MBC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야
까닭모를 경제위기로 생존권을 박탈당하며
이 땅 어느 그늘진 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천만의 시야
나도 알고 보면 그냥 시인만 되고 싶은 시인
하지만 이 시대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
11
오래도록 나는 없는 말들을 꿈꾼다
- YTN 언론 자유 사수를 위하여
오래도록 나는 내 글이 글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닌 글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읽히기를 소망했다 글읽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이어, 이건 내 이야기잖아 이렇게 쉬운 글이면 나도 쓰겠네 어, 이런 이야기도 글이 된다면 나도 소설 몇 편은 쓰겠네 라고 자신감을 주는3류 4류 7류 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나는 내 글이 거리에서 읽혀지기를 바랬다 너무 예민해 쉽게 상처받는 연약한 글이 아니라 너무 고상해 좋은 탁자와 조명이 필요한 글이 아니라 너무 고차원이어서 졸음이 오는 글이 아니라 남대문시장 리어카꾼의 리어카 바퀴처럼 막 굴려도 되는 글 기름때 절은 장갑처럼 소용만큼 쓰이고 버려져도 좋은 글시장 좌판에서 듬뿍듬뿍 주어지는 덤과 같은 글 너무 쉽게 외워져 종이는 공중 화장실 화장지 정도로 쓰여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나는 내 글이 꽃이 아닌 무기가 되기를 바랬다 없는 이들이 분노로 드는 창 끝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들이 드는 철퇴 굴종에 불과한 너절한 화해의 말이 아닌 증오의 송곳이 되기를 바랬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전선의 바리케이트가 되고 양심의 밥이, 정의의 혀가 되기를 바랬다 사실은 가장 편파적일뿐인 중립과 객관을 넘어 반자본, 반전평화의 주관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를 바랬다
KBS가 MBC가 YTN이그런 말들을 담는 방송이 되기를 바랬다 아니다 무색무취한 독인 객관만이라도 지켜주는 방송 최소한의 형평과 양심이 지켜지는 방송 민중의 편이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독재자의 거실에 갇힌 앵무새 거짓의 나팔만은 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바램은 쉽게 무너졌다 독재자의 하수인들이 언론 장악에 나서고 있다 이것은 전쟁이다 민중을 향한, 없는 자들을 향한, 곧은 말과 행동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작전의 개시, 도전이다 1973년 동아투위에 대한 모욕이다 1980년에 대한 도발이다 1987년에 대한 음해다 2008년 광화문 촛불들을 향한 전방위적 학살이다 총체적인 총체적인 반격이다
조종을 울려라 권력이 없는 자들이여 가진 게 없는 자들이여 양심의 촛불을 끄지 못해 온밤내 흔들리는 영혼들이여 민주주의가 학살당하고 있다 거리와 광장이 닫히고 우리들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있다 나의 자유가 나의 표현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닫혀가고 있다 서서히 서서히 너무도 음산하게 독재가 부활하고 있다 압제가 부활하고 있다 수구가 보수가 부활하고 있다 병든 마음들이 밝은 마음들을 검은 제복들이 다양한 색을 하나의 입이 수만의 혀를 딱딱하게 죽은 형식들이 생기발랄한 내용들을 짓밟고 있다
일어서라 권력이 없는 자들이여 가진 게 없는 자들이여 지켜라 우리 모두의 혀를 우리 모두의 상상력을 만인의 것을 소수의 것으로 하려는 자들에 맞서 사수하라, YTN을사수하라, YTN을 나의 자유 나의 평화 나의 평등 나의 상상력을
송경동 시인
1967년 전남 벌교 출생으로 2001년 <시로 여는 세상>과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2006년 '삶이 보이는 창'에서 나온 <꿀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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