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봄꿈

미송 2012. 3. 10. 08:47

 

 

봄꿈 / 오정자
- 줄 장미 벽지와 가습기와 겨울나무

연두로 벽 세칸을 칠하자
노란 줄장미들이 올라간다
수직으로 일어서는 풀밭들
빛의 반사에 따라 말랑말랑해지는 벽
마음도 저런 벽을 닮을 수 있다면
연정이 싹트는 벽,
색색 소품들이 보색(補色)관계일 때 나는
더욱 끌리지 대척점(對蹠點) 중앙에서

연꽃 모양 가습기에서 안개가 핀다
물 바닥이 보이진 않나
수증기를 잘 뿜고 있나
혹여 죽어버리지 않았나
초록 감지기에 꽂히는 불꽃
마른 입술을 적셔주던 공력자에 대한
예우(禮遇)

겨울나무가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였듯
나도 나무의 이름을 부른다
여린 맥 짚어주던 일과 들녘에서의 만남
때때로 잊기도 했겠지만
(설탕, 커피, 라면, 계란, 로션을 꼭 사와야지
메모하고서 메모지를 두고 나가는 것처럼)
겨울에 만났기에 겨울나무라 불렀던 기억 외
뿌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가
미세한 입김 위 양각(陽刻)으로 새겨진 나무
부스럭 기지개를 켤 때마다 꾸는


겨울나무의 기지개에서 가습기의 안개처럼 모락, 피어오르는 꿈. 아, 그 꿈이 그렇게 봄이 되나 봅니다. 연록색으로 도배하는 방 안에서 문득, 마주치는 봄꿈. 잊고 있었던 겨울나무의 꿈을 기억하곤, 초록 감지기에 꽂힌 불꽃처럼 對蹠點에서 서성이던 마음은 온통 연두빛으로 방 안 가득 일어나고. 줄 장미 벽지와 가습기, 그리고 겨울나무의 꿈이 한데 엮어내는 저 확실한 補色의 변증법 앞에서 그 누구라도 향긋한 禮遇를 취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네요. <안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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