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늑대와 여우

미송 2012. 10. 10. 07:45

 

늑대와 여우 / 오정자

대체로 고요해
저 들꽃처럼

붉은 해 파도 누구의 것이냐 묻는 이 없다
바라봄으로 채워지는 원리
원근법을 익혀 온 우리가
거리가 구원을 준다는 데야
가볍게 웃지

별안간 찾아든 바람에
호명되지 않은 자 행복하다
진군하는 생에 눈이 멀고
파열되거나 해체되는 한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건
나를 발견한 이후 최초의 기적

흩어질 점
한 곳 향해 앉을 수 있다면
허울을 묻지 않으리니
둥지를 틀자 무명 숲에
슬프나 담담한 짐승처럼.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상(像)의 초점이 흐려지기도 하는데. 따라서 적당한 거리는 상대를 바라보는, <탁월한? 遠近法>일 거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거의 기적과도 같겠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意味로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확률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그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던가?) 나는 평소(平素)에 설령, 관념처럼 읽혀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관념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에 詩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의 詩에서 그것의 전형(典型)을 만나는 느낌도 들고. 늑대와 여우에서 얼핏, 연상되는 건 남자와 여자인데 (아닌가?) 아무튼 그런 즉흥적 상상력을 배제(排除)하고서라도, 우선은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게 한다는 점에서 시인 특유의 詩的 테크닉(Technique)이 돋보인다.

 

들꽃, 붉은 해, 파도, 원근법(遠近法)과 구원의 관계, 바람의 호명(呼名), 진군해 오는 生, 파열과 해체의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최초의 기적, 흩어질 길과 허울의 길, 무명 숲의 둥지, 슬프나 담담한 짐승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는 일련의 상징적 이미지(Image)들에서 삶이 엮어가는 그 어떤 파노라마(Panorama)를 보는 듯도 하다.

 

어쩌면, 삶이 규정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픔으로서의 <서러운 순응[順應]>이라는 한 의식(意識)도 읽혀지고. 그렇다. 늑대와 여우는 그렇게 서로 상대를 통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영혼의 밑그림>을 그렇게 그려가는지도 모를 일. 늑대와 여우 그들은 혈통적으론, 거의 같은 권속(眷屬)이지만.... 늘 서로 거리를 두고 지낸다는 점에서, <고요한 원근법>에 통달(通達)한 짐승이란 생각도 해보며. 또한, 서로의 허울 같은 건 더욱 물으려 (Ask --- Bite가 아닌) 하지도 않는다는 거에 고개 끄덕이며. <안희선 시인>

 

 

끼적이는 습관이 대개 그랬죠. 일기형식으로 한 십 년, 수필형식으로 한 오 년. '詩的이다' 가 뭔지도 모르면서 행갈이 해서 간추리면 시가 되는 줄 알았던 시절. 그 졸작들 中, 2007년 시월에 튀어나왔던 것이 또 그렇게 2008년에 詩로 둔갑을 해서 나왔었군요. 2010년에 ssun이란 정갈한 작가를 통해 한바탕 노래하고 춤추었던 추억도 있고, 또 잊을 만하면 복습하듯 감상을 하게 된 2012년도 있었으니, 시란 그것을 쓴 사람보다 수명이 더 긴 거 같네요. 逆으로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 그리 나쁘진 않네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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