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유식무경唯識無境

미송 2023. 6. 15. 13:11

개체존재인 색의 실유성을 주장하는 독단적 유물론이나 보편 존재인 명의 실유성을 주장하는 독단적 관념론은 둘 다 정당화될 수 없다. 색이나 명은 모두 식의 소연 또는 소변으로서 식을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이나 명으로서의 현상이 근거는 근본식인 마음이며, 이처럼 마음이 일체 현상을 창출해 내는 내적 근거라는 의미에서 유식의 존재론은 내적 초월주의이다.

 

그러나 그 마음 역시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현상을 구성하는 마음의 활동성은 현상 세계 속에서의 지난 경험의 축척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색이나 명의 현상 세계를 형성하는 아뢰야식은 현상을 벗어나 있는 제1원인이나 제1실체로서의 절대자가 아니다. 그것은 현상의 경험을 통해 그 내용이 확정되고 변경되어 가는 역사적 시대정신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각 개인의 표면적 의식에 가려진 채 그 심층에서 작용하고 있는 우주적 무의식과도 같다. 

 

일체의 현상 세계는 바로 우리 영혼 깊이 무의식 차원에서 작동하는 우주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심층의 무의식적 에너지가 인간 각자의 개체적 차별성을 넘어 하나로 이어져 있기에, 현상의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아뢰야식 내의 공종자共種子가 현행하여 하나의 기세간器世間을 형성하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가 경험하는 각각의 세계가 결국 하나의 기세간이 되는 것은, 개체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각각의 아뢰야식이 궁극적으로는 전체 현상을 이루는 하나의 우주적 마음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유식의 실천론은 바로 이와 같이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심식心識의 활동성을 자각함으로써 자아와 세계, 자아와 타자의 내적 연관성을 올바로 깨달으려는 노력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유식성의 자각自覺’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유식성의 자각이란, 우리 각자의 마음 심층에서 작용하는 우주적 무의식의 활동성을 우주 현상의 근원으로 자각함으로써 제한된 현상(我와 法)에 대한 집착을 벗고 무한의 우주적 일심一心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 안의 무한을 자각하여 욕망적 개체 의식을 극복하고, 심층의 활동성을 자각하여 무명無明을 극복하는 것이다. 욕망을 벗음으로써 열반을 얻고, 무명을 벗음으로써 지혜를 얻는 것이다. 

 

진여眞如란 이와 같이 현상으로 변현하는 우주적 일심一心을 자신의 본질로 자각한 주체를 의미하며, 진여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바로 그 일심의 현현으로서의 일진법계一眞法界가 된다. 이렇게 해서 집착적 개체 의식에 의한 현상의 실체화가 멈추는 그 자리에서 식은 지혜로 바뀌고 경은 참된 법계로 드러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물질적 또는 관념적 현상 세계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변현한 가假의 현상이다. 결국 식을 떠난 독립적 실체로서의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무경'은, 경으로 전변하는 그 심층의 아뢰야식의 활동을 자각함으로써 '현상초월적 주체 의식' 또는 '개체 안의 개체초월적인 보편적 일심'을 얻고자 하는 노력, 즉 견성見性하여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한자경<唯識無境,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22~23쪽 中

 

 

 

20141202-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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