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집에 관한 시 6편

미송 2012. 4. 1. 13:19

 

 

 

집이 떠나갔다 / 정우영

 

아버지 가신 지 딱 삼년 만이다.

아버지 사십구재 지내고 나자,

문득 서까래가 흔들리더니

멀쩡하던 집이 스르르 주저 앉았다.

자리 보전하고 누워 끙끙 앓기 삼년,

기어이 훌훌 몸을 털고 말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렇듯 매서운 날 가시는가,

손끝 발끝이 시려왔을 뿐이다.

실은 그날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숨소리 끊기자 모두 다 빛을 잃었다.

아버지 손때 묻은 재떨이와 붓, 벼루가

삭기 시작했고 문고리까지 맥을 놓았다.

하여 사람들은 집이 떠나감을

한 세계가 지는 것이라 했는가.

두 손 모두어 경배하고

나이 마흔 넷에 나는 집을 떠난다.

 

 

길의 집 / 정우영

 

풀이슬 포르르 떨어져 싱그러운 새벽, 나는 길을 따라

나선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길에게

몸을 맡겨둔다. 길은 아무데로든 달려간다. 길은 마치 아

지랑이처럼 흔들리며 나아간다. 가다가 구름을 만나 잠

시 쉬어가기도 하고, 너무 더우면 산자락에 숨어들어 풋

잠에 빠지기도 한다. 길은 내가 저를 다잡으려 하기만 하

면, 저 숲속 어딘가로 달아나 숨어버린다. 매미가 맴맴

아득하게 울어대는 낯선 풍경 속으로 나를 풍덩 빠뜨려

버린다. 나는 하아하아 밭은 숨을 내뱉으며 헤엄치다 문

득 맥을 놓는다. 틀어쥐고 쫓아가는 게 아니라 나를 맡겨

두어야 하는데, 나는 가지런히 숨을 고르며 처음으로 다

시 돌아간다. 평온하게 발 내려 길을 더듬는다. 그러면

길은 다시 긴 숨을 내쉬며 어둠을 건너간다. 혼미를 타고

온갖 환영들이 나에게 밀려들지만 나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길은 이렇게 달려 마침내 어디에서 멈출까. 길의

집은 어디일까.

 

 

공중에 걸린 집 / 이규리

 

(죽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간을 중음(中陰)이라 부른다

그동안 혼백은 지상도 천국도 아닌 그곳에 머문다)

 

이승을 이별하는데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한 걸 누가 알았을까

그리하여 누가 공중에 집을 지었던 걸까

중음이라는 집,

누드 엘리베이터를 타면 난 늘 중음으로 가는 듯 착각이 들곤 했어

아득한 공중 투명한 유리집으로 가는 듯 했어

이제 그 고요 안으로 내 어머니마저 드시고

마흔 아흐렛날 동안

누가 밥상을 돌보는지 장판을 데워놓는지

4층이 3층에게 놀러가는 것처럼

2층에서 20층으로 이사하는 것처럼

뭐 그러하시기를 간신히

49, 49 중얼거리다보니

49는 참 친근한 숫자라는 생각

그 집이 49번지는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우리가 허망할 때 왜 그리 허공을 보는지 알 것 같았다

 

 

 

집 아닌 집 있다 / 길상호

 

집을 잘못 골라 든 게가 변을 당했다

파도횟집 접시에 올려진

소라를 빼먹으려고 보니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게 한 마리,

구멍 밖으로 내민 집게발에

찢긴 파도 한 자락 몰려 있었다

단단한 믿음이었던 집이

소용돌이로 한 생을 삼킬 때 있다

억센 근육의 가장(家長)들 몇이 모여

빚더미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집 빠져나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 시작)

 

 

 

이웃집 / 안도현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개 데리고 우리 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월경(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 세사르 바예호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다 가버렸어요. 응접실, 침실, 정원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지요."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떠나버리면, 누군가가 남게 마련이라고. 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곳에는 인간의 고독이 있는 것이라고. 새로 지은 집들은 옛날에 지은 집보다 더 죽어 있는 법. 담은 돌이나 강철로 된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집을 짓는다고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사람이 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란, 무덤처럼,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집과 무덤이 너무너무 똑같은 점이지. 단, 집은 인간의 삶으로 영양을 취하는 데 반해서, 무덤은 인간의 죽음으로 영양을 취한다는 게 다른 거다. 그래서, 집이 서 있고, 무덤은 누워 있는 법.

모두들 집에서 떠났다는 것은 실은 모두들 그 집에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의 추억이 그 집에 남은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그 집에서 산다는 말은 아니지. 집으로 인해 사람들이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일 뿐. 집에서 각자 맡았던 일, 일어났던 일 같은 것은 기차나 비행기, 말 같은 것을 타고 떠나거나, 걸어가 버리거나, 기어서라도 떠나버리면 없어지지만, 매일매일 반복해서 일어나던 행동의 주인이었던 몸의 기관은 그 집에 계속 남는 법. 발자취도 가버렸고, 입맞춤도, 용서도, 잘못도 없어졌다. 집에 남아 있는 건, 발 입술 눈 심장 같은 것. 부정과 긍정, 선과 악은 흩어져버렸다. 단, 그 행동의 주인만이 집에 남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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