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날아가는 방
-창문은 멸종하지 않기를 바란다
창문 1
형은 그림을 포기하고 마을버스를 운행한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똥구멍이 붙은 채 골목에서 낑낑거리는 개들을 향해 사람들은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나는 걸레로 기르던 개의 눈을 닦아 주었다 입에 녹색 테이프를 붙인 소녀들이 밤이 되어도 멈추지 않고 고무줄을 뛰어넘었다 허공에서 조금씩 몸이 사라져갔다 새끼를 가진 박쥐들이 낮인데도 입을 벌리고 날아다녔다
창문 2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처녀보살이 집 밖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 의자에 앉아 느리게 담배를 피우며 온 종일 그녀는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았다 집을 창문으로 들어갔다가 창문으로 나오는 사내가 있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기 시작했다 목화향이 나는 삼층집에선 밤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가는 손목이 오늘은 창문에 가지처럼 걸쳐 있다
창문 3
밤이 되자 젊은 신부가 창문에 얼굴을 달라 붙이고 인간의 방들로 흘러들어가는 꿈을 바라본다 아버지 나를 버리지 마라 수녀가 거리에서 죽은 성자의 입 안에 자신의 팬티를 벗어 넣어준다 신부와 수녀가 안고 잠드는 푸른빛의 방에서 밤마다 고양이 같은 울음이 들려온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형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늙은 어머니들이 창문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구구단을 쓰고 있다 얘야 나는 이제 구구단도 잘 외운단다 아버지 나를 버리지 마라
창문 4
114를 누르고 누군가 구조 요청을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정말 미안해요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비행선이 오고 있다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우린 꼭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운다 114를 누르고 조금만 대화하자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당신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평생 볼 수가 없어요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이 도시가 참 그래요......라고 한다 114를 누르고 벙어리가 제 이름을 몇천 번씩 부르며 연습한다 114를 누르고 누군가 얼굴 없는 울음을 조용히 보낸다 지금 저쪽에서 기록되고 있을 통화 내역을 믿으며 제 울음의 화석을 만들기 위해 조용히 어둠 속에서 114를 누르는 창문
창문 5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種의 울음소리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창문 6
그러나 나는 이미 멸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울어야 하는데 도대체 울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우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았다 밤낮없이 귀에다 세상을 휘돌아와 서걱대는 소리로만 남은 음악들을 퍼부어 넣었다 가끔 음과 음 사이에서 윙, 하는 이명이 들리기도 했다 우는 방법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폭포같이 흘려대던 눈물이 그리웠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울음소리 없는 종족이라니, 뭔가 잘못되었다고 오류로서 슬픈 열대속에 기록되어질 것이다 여전히 그 4월이었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그것을 위하여는> (0) | 2012.04.10 |
---|---|
최규승<처럼처럼> (0) | 2012.04.03 |
집에 관한 시 6편 (0) | 2012.04.01 |
정우영<정암사 열목어> (0) | 2012.03.31 |
김승일 -방관, 이이체 - 인간은 서로에게 (0) | 2012.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