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장석남<오솔길을 염려함>외

미송 2012. 4. 27. 18:58

 

 

오솔길을 염려함

 

나는 늘 큰길이 낯설므로

오솔길을 택하여 가나

어머니는, 내가 가는 길을 염려하실 테지

풀이 무성한 길, 패랭이가 피고 가을이라

나뭇잎이 버스럭대고 독한 뱀의 꼬리도 보이는

맵디매운 뙤약볕 속으로 지워져가는 길

어느 모퉁이에서

땀을 닦으며 나는 아마 나에게

이렇게 질문해볼 거야


나는 어찌하여 이, 뵈지도 않는 길을 택하여 가는가?

어머니의 기도를 버리고 또

세상의 불빛도 아득하게


누군가 내 속에서 이렇게 답하겠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 길이, 내 발 앞으로, 가슴속으로, 눈으로 와 데려가고 있다고


가을 아침의 자욱한 첫 안개와

바짓단에 젖어오르는 이슬들도

오래전부터 아는 듯 걸어갈 테지

어머니의 염려나 무거워하면서 여전히 걸어갈 테지

안개 속으로 난 아득한 오솔길을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오막살이 집 한 채’에서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묵집에서’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열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

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세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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