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류시화<소금>외 17편

미송 2012. 4. 25. 08:18

 

詩集 "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

 

 

 

소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들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가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나비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저편 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질경이

 

 

그것은 갑자기 뿌리를 내렸다, 뽑아낼 새도 없이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어떤 사람은 질경이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둘러 뽑아 버릴수록 좋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질경이가

인생의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그러나 아무도 질경이를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한때 나의 삶에서

슬픔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질경이의 이마 위로

여름의 태양이 지나간다

질경이는 내게

단호한 눈짓으로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두라고

 

얼마나 많은 날을 나는

내 안에는 방황했던가

8월의 해시계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고

질경이의 영토를 지나왔다

여름의 그토록 무덥고 긴 날에

 

 

 

나무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쓴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은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살낱 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만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짧은 노래

 

 

벌레처럼

낮게 엎드려 살아야지

풀잎만큼의 높이라도 서둘러 내려와야지

벌레처럼 어디서든 한 철만 살다 가야지

남을 아파하더라도

나를 아파하진 말아야지

다만 무심해야지

울 일이 있어도 벌레의 울음만큼만 울고

허무해도

벌레만큼만 허무해야지

죽어서는 또

벌레의 껍질처럼 그냥 버려져야지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힌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을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저녁의 꽃들에게

 

 

연필이 없다면 난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시를 쓰리라

 

내게서 손가락이 사라진다면

입술로

바람에게 시를 쓰리라

 

입술마저 내게서 가버린다면 난

내 혼으로

허공에다 시를 쓰리라

 

내 혼이 어느날 떠나간다면

아, 그런 일은 없으리라

난 아직 살아 있으니까

 

 

 

길 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런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잔 없이 건네지는 술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비목: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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