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만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시인의 말
서울생활을 접고 강원도로 내려온 지 삼년이 되어간다. 매일 강을 바라보는 일의 지복함을 맘껏 누리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하다고 원없이 말하면서 날마다 무릎 꿇고 이 땅에 입맞춘다.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이토록 행복해질 수 있다니,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면서 문득 길의 몸을 본 것 같다. 더듬거리며 그 몸을 찾아나설 때가 다시 오고 있음을 안다. 더 멀리 가야한다.
더 큰 고통과 축복의 몸들에게로. 여전히 내 언어는 불화의 쪽에 있지만, 내 속에 오래도록 나를 불러온 허방으로 두려움없이
가야겠다. 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다.
2003년 초가을 강원도에서 김선우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2003,창비시선 229)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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