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남준<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외

미송 2012. 5. 12. 06:58

 

 

 

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 박남준

이제 뜰 앞의 산과 강 모든 들판은 꽃들의 세상
묵묵히 지난 시간의 겨울을 견뎌온 것들이
일제히 광장의 깃발처럼 지상에 나부낀다
얼굴을 맞대고 내걸린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에 다음 생의 어린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 들여다보게된 시간까지를 흘러오는 동안
내 정신의 안과 밖
끊임없는 새들이 둥지에서 태어나고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동안 내 귀밑머리도 하얗게 흘러왔으리니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꽃이 질 무렵 올라오는 노루귀 새 잎새
흰 솜털 보송보송한 솜털 꼭 노루귀를 닮았다

나도 이렇게 솜털 보송거리던 나이가 있었으리
그렇듯 나 이제 검은 머리 새하얀 불귀의 시간
잊어야 할 일들이 많다 노여움은 자주 오고
살아 있는 일이 한갓 꿈같다
봄날, 내 곱고 붉은 사랑들은 일장춘몽이런가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 있기나 했던가
까마득하다 가물거린다 아득한 어제다

한때 한 포기의 풀이라면 그 풀의 극점, 꽃처럼 살고자 했으나
줄기라면 잎새라면 아니 땅속 뿌리라면 또한 어떠리
모든 것들의 순간순간 저마다 극에 이르지 않은 것들
어디 없으리 꽃 피우고자 했으나 새순이 뽑힌들,
어린 봉오리로서 세상을 다한들 그들의 한때
아름답고 꼿꼿하지 않은 날 어찌 없었으리

무수한 날들이다, 그 안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시집<적막>(2005, 창비시선 256)  

 

 

 

 

화살나무 / 박남준

 

그리움이란 저렇게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갈기 세운 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녘을 향해 꽂혀 들고 싶은 것이다

화살나무,

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있다

 

 

 

시인의 말

 

사십대에 내는 마지막 시집이다. 불혹의 얼굴이 궁금하던 날이 있었는데

어느새 반백의 머리칼, 오십을 지척에 두고 있다. 오십이 되면 내 시가 좀

변해지기는 할 것인가.

어둡고 습한 모악산 외딴집에서 쓴 시들과 이곳 따뜻하고 환한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와서 씌어진 시들을 보태고 작년 생명평화 탁발순례 길에

쓴 시편 중 몇편을 덧붙여 엮었다.

시를 찾아, 시에 갇혀, 결국 여기까지 왔다.

 

2005년 겨울 지리산 자락 악양에서 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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