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비 내리듯 / 뽈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이
내 가슴에 조용히 비가 내리네
내 가슴에 스며드는
이 우울함은 무엇일까
땅과 지붕 위에 내리는
이 울적한 가슴에 울리는
오 비의 노래여
병든 이 가슴에
공연히 비가 내리네
뭐라고? 배반이 아니라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네
이유를 모르는 건
가장 나쁜 고통
사랑도 증오도 없지만
내 가슴은 고통 투성이네.
비 / 정지용
오피스를 벗어나왔다.
레인코트 단추를 꼭꼭 잠그고 깃을 세워 터가리까지 싸고 쏘프트로 누르고 박쥐우산 알로 바짝 들어서서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가리어 디디는 것이다.
버섯이 피어오르듯 후줄그레 늘어선 도시에서 진흙이 조금도 긴치 아니하려니와 내가 찬비에 젖어서야 쓰겠는가. 안경이 흐리운다. 나는 레인코트 안에서 움츠렸다. 나의 편도선을 아주 주의하여야만 하겠기에 무슨 정황에 뽈 베를린의 슬픈 시 '거리에 내리는 비' 를 읊조릴 수 없다.
비도 추워 우는 듯하여 나의 체열(體熱)을 산산히 빼앗길 적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같이 날씬하여지기에 결국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여마(驪馬)처럼 떨떨거리고 오는 흰 버스를 잡아탔다.
유리쪽마다 빗방울이 매달렸다.
오늘에 한해서 나는 한사코 빗방울에 걸린다.
버스는 후루룩 떨었다.
빗방울은 다시 날아와 붙는다. 나는 헤어보고 손가락으로 비벼보고 아이들처럼 고독하기 위하여 남의 체온에 끼인 대로 참하니 앉아 있어야 하겠고 남의 늘어진 긴 소매에 가리운 대로 잠착해야 하겠다.
빗방울마다 도시가 불을 켰다. 나는 심기일전 하였다. 은막에는 봄빛이 한창 어울리었다. 호수에 물이 넘치고 금잔디에 속잎이 모두 자라고 꽃이 피고 사람의 마음을 꼬일 듯한 흙냄새에 가여운 춘희도 코를 대고 맡는 것이다. 미칠 듯한 기쁨과 희망에 춘희는 희살대며 날뛰고 한다.
마을 앞 고목 은행나무에 꿀벌 떼가 두룸박처럼 끌어나와 잉잉거리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뛰어나와 이 마을지킴 은행나무를 둘러싸고 벌떼 소리를 해가며 질서 없는 합창으로 뛰고 노는 것이다. 탬버린에 하다못해 무슨 기명 남스래기에 고끄랑 나발 따위를 들고 나와 두들기며 불며 노는 것이다. 춘희는 하얀 칠칠 끌리는 긴 옷에 검정때를 띠고 쟁반을 치며 뛰는 것이다.
동네 큰 개도 나와 은행나무 아랫동에 앞발을 걸고 벌 떼를 집어삼킬 듯이 컹컹 짖어댄다.
그러나 은막에도 갑자기 비도 오고 한다. 춘희가 점점 슬퍼지고 어두워지지 아니치 못해진다. 춘희가 콩콩 시침을 할 적에 관객석에도 가벼운 기침이 유행한다. 절후의 탓으로 혹은 다감한 청춘사들의 폐첨(肺尖)에 붉고 더운 피가 부지중 몰리는 것이 아닐까. 부릇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춘희는 점점 지친다. 그러나 흰나비처럼 파닥거리며 흰동백꽃에 황홀히 의지하련다. 대체로 다소 고풍스러운 슬픈 이야기라야만 실컷 슬프다. 흰 동백꽃이 아주 시들 무렵, 춘희는 점점 단념한다. 그러나 춘희의 눈물은 점점 깊고 세련된다.
은막에 내리는 비는 실로 고운 것이었다. 젖어질 수 없는 비에 나의 슬픔은 촉촉할 대로 젖는다. 그러나 여자의 눈물이란 실로 고운 것인 줄을 알았다. 남자란 술을 가까이 하여 굵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다. 여자란 눈물로 자라는 것인가 보다. 남자란 도박이나 결투로 임기웅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란 다만 연애에서 천재다.
동백꽃이 새로 꽂힐 때마다 춘희는 다시 산다. 그러나 춘희는 점점 소모된다. 춘희는 마침내 일가(一家)를 완성한다. 옆에 앉은 영양(令孃) 한 분이 정말 눈물을 흐트러놓는다. 견딜 수 없이 느끼기까지 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어느 처소에서 물론하고 처지에 곤란하도록 좀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고 좀 면난(面暖) 하기도 한 것이다. 그레타 가르보 같은 사람도 평상시로 말하면 얼굴을 항시 가다듬고 펴고 진득히 굴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먹새는 남보다 골라서 할 것이겠고 실상 사람이란 자기가 타고나온 비극이 있어 남몰래 앓을 병과 같아서 속에 지녀두는 것이요 대개는 분장(汾裝)으로 나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어찌하였든 내가 이 영화관에서 벗어나가게 되고 말았다.
얼마쯤 슬픔과 무게(重量)를 사가지고.
거리에는 비가 이때껏 흐느끼고 있는데 어둠과 안개가 길에 기고 있다. 타이어가 날리고 전차가 쨍쨍거리고 서로 곁눈 보고 비켜서고 오르고 내리고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이 모두 영화와 같이 유창하기는 하나 영화처럼 곱지 않다. 나는 아주 열(熱)해졌다.
검은 커튼으로 싼 어둠 속에서 창백한 감상이 아직도 떨고 있겠으나, 나는 먼저 나온 것을 후회치 않아도 다행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 떼를 지어 브로마이드 말려들어가듯 흡수되는 이들이 자꾸 뒤를 잇는다.
나는 휘황히 밝은 불빛과 고요한 한구석이 그리운 것이다. 향그러운 홍차 한 잔으로 입을 축이어야 하겠고, 나의 무게를 좀 덜어야만 하겠고, 여러 가지 점으로 젖어 있는 나의 오늘 하루를 좀 가시우고, 골라야 견디겠기에 그러나 하루의 삶으로서 그만치 구기어지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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