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후광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의 관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인가.
오랜만에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한다.
유리창을 닦으면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마음을 닦으면 세상 이치가 환
해지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듯이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고, 아무리 퇴색한 기억도 오래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얼굴빛이 밝아지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면
환하게 상처가 아물고, 돌멩이라도 쓰다듬으면 마음 열어 반짝반짝 대화
를 걸어오듯이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속에는
탁하고, 추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많이 쓸수록 빛이 나는 이 말들은
세상을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힘을 갖고 있다.
월간『현대시학』2008년 11월호 발표
관음 1
어느 봄날
차를 몰고 청도 깊은 계곡 지나다
길옆 복숭아밭으로 들어가서
냅다 바지 내리고 쉬~를 하다
슬쩍 주위를 살폈더니 글쎄
몰래 훔쳐보던 요염한 복사꽃들
화,
일제히 참았던 웃음 까르르
터뜨리던 일이여.
다시 어느 여름 달밤
애인과 청도 깊은 계곡 노닐다
이윽고 밤이 알맞게 깊었을 때
복숭아밭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녀의 희고나 둥근 엉덩일 까고
한참 그 짓을 하다 멈칫 보니 글쎄
으,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복숭아들
볼이 터질 듯 붉어져선
차마 무겁게 고갤 떨구던 일이여.
관음 2
달빛이 길을 쓰는 가을밤
아득한 산중 자궁골짝 냇가에
별들이 내려와 멱을 감고 있다
물장구치며 놀고 있다
헉,
나는 들킬세라 바위 뒤에 숨어
그 눈부신 깔깔거림과
희디흰 알몸을 훔쳐보다 그만
날이 샜다
총
총
하산길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철벅철벅
우물 긷는 소리
관음3
인적 드문 무더운 여름밤
홀딱 벗고 섬진강에서 낚시를 하다,
얕은 물속에 드러누워 꼿꼿하게
낚싯대를 세우고 유유자적하다,
아무래도 부끄러워 주위를 둘러보니
산마루에 숨어 그걸 훔쳐보던 보름달이
화들짝 놀라 얼굴 붉히는 것 아닌가
살포시 고개를 수그리는 것 아닌가
그때 마침 물고기까지 물고 늘어져선
낚싯대가 팽팽하게 휘어지며 끄덕,
끄덕거리던 일이여
김선태 시집<살구꽃이 돌아왔다> 70-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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