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형기 시인의 시편들

미송 2012. 5. 18. 18:59

 

1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2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3

나무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 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4

코스모스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5

절벽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6

봄밤의 귀뚜리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子正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原始林을 마구 뒤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都心의 숲 솟은 高層街

그것은 原始에서 現代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7

앉은뱅이꽃

 

앉은뱅이꽃이 피었다

작년 피었던 그 자리에

또 피었다

진한 보라빛

그러나 주위의 푸르름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풀꽃

이름은 왜 하필 앉은뱅이냐

그렇게 물어도 아무 말 않고

작게 웅크린 앉은뱅이꽃

사나흘 지나면 져버릴 것이다

그래 그래 지고말고

덧없는 소멸

그것이 꿈이다

꿈이란 꿈 다 꾸어버리고

이제는 없는 그 꿈

작년 그대로 또 피었다

 

 

8

분수(噴水)

 

너는 언제나 한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는 모순의 물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운다

오 순수, 냉담한 정열!

 

 

9

파도

 

그것은 일제히 저쪽에서 달려온다

허옇게 거품을 물고 부딪힌다

그리고 끝내 무릎을 꿇고 만다

끊임없이 그렇게 되풀이 하는 것

어제의 죽음을 쓸어가는 오늘의 죽음

그래도 아무 것도 불어나지 않는 것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지기 위해 또 일어서라

파도여 파도여

절망을 확인하는 몸부림이여.

 

 

10

시지프스의 달력

 

시지프스의 달력에는 날짜가 없다

다만 이렇게 씌어 있을 뿐이다

- 해가 뜬다

해가 뜨는 지구의 그 뒤쪽에선 그때

저녁 노을 바야흐로 붉게 타고 있다

아, 끝이 곧 시작인 노역자여!

 

 

11

연애편지

 

구식이긴 하지만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수동이든 전동이든 편리한 타자기론 한숨이 배지 않아 쓸 수 없는 편지 그래서 꼭 쥔 연필 한 자루 입맞추듯 때때로 침을 묻혀가면서 글씨야 예뻐져라 또박또박또박 또박이 재깍재깍으로 바뀌어 밤을 새는 편지 답장은 없다 다만 창밖에 스산한 찬바람이 낙엽을 굴린다(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쓰는 편지 그것은 타자 쳐서 사진식자로 인쇄하는 홍보용 인사장이 아니다 일 대 일이다 이쪽도 혼자 저쪽도 혼자 실은 저쪽한테 묻지도 않고 이쪽이 혼자 또박또박 재깍재깍 밤을 새우는 지금도 창밖에는 답장 없는 스산한 찬바람 낙엽이 굴고 있다(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쓸밖에 없는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혁웅 시인의 시편들   (0) 2012.05.20
이병률 시인의 시편들  (0) 2012.05.19
최호일<웃음의 포즈>외  (0) 2012.05.17
김선태<말들의 후광>외 3편  (0) 2012.05.15
박종화<작은 시작>외 1편  (0) 2012.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