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피(猖披)란 짐승이 있어, 무안(無顔)과 적면(赤面)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산다 야행성이라 잘 눈에 띄지 않지만 간혹 인가에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진다 팔다리가 가늘고 귀가 뒤로 말려서 비루먹은 곰처럼 생겼다 산정을 좋아해서 오르다가도 꼬리가 무거워 늘 골짝으로 떨어진다 이 짐승의 가죽을 얻으면 얼간망둥이를 면할 수 있다
2
낭패(狼狽)는 이리의 일종이다 낭은 뒷다리가 짧고 패는 앞다리가 없어서, 길을 가려면 반드시 두 마리가 짝을 이뤄야 한다 전하여 서로의 배필을 찾지 못했을 때를 낭패라 하고, 동성의 짝을 만나 겹으로 쓸모를 잃었을 때를 낭낭패패라 한다 이 짐승을 달여 먹으면 어지자지가 떨어져 한 몸이 둘이 된다
3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이 있으니 이를 무족마(無足馬)라 한다 인적 끊긴 지 오래인 인가의 굴뚝을 끌어안고 살다가, 성체가 되면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긴 혀로 수염에 붙은 침이나 귓속의 귀지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에 천 냥이나 하는 귀한 짐승이어서 특별히 이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를 말전주꾼이라 부른다
4
암상이라고도 부르는 질투(嫉妬)는 암컷이고, 수컷은 따로 시기(猜忌)라고 부른다 떼를 지어 다니며 사람을 잡아가서는 벼랑 위에서 밀거나 동굴에 가둔다 육질을 연하게 하거나 소금물에 재워두기 위해서다 송곳니와 어금니가 두루 나 있어서 고기를 자르거나 으깰 수 있다 구들직장이 아니고서는 이 짐승의 눈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5
외설(猥褻)은 사면발이의 한 종류다 눈이 작고 앞니가 돌출해 있어서 서생(鼠生)을 닮았으나 그보다도 작고 바글바글하다 어느 구멍이든 파고들기를 좋아해서 한번 자리를 잡으면 색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나를 잡으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죽이면 넷이 나타나, 마침내 온 집을 가득 채운다 더러우니 먹어선 안 된다
6
개차반 있는 곳에 파리가 있으나 개중에는 군집을 싫어하는 놈들이 있어서, 이를 청승(靑蠅)이라 한다 볕 잘 드는 곳에서 눅눅한 날개 말리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다 간혹 날개가 바싹 말라서 굶어 죽기도 한다 몸 전체가 푸른빛이어서 청백리들이 좋아한다 처마 밑에서 겨울을 나지만 뇟보나 계명워리가 드는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소문들 ― 짐승」 전문
1
파라과이의 사막에 사는 풍선개구리(Lepidobatrachus laevis)는 쓰고 버린 개짐이나 퍼질러놓은 똥처럼 생겼다 짧은 우기가 왔을 때 물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다 미안하지만 버려진 것은 눈물을 삼켜도 버려진 것이다 생리나 설사를 기록해둔 첫날밤이란 없다 그는 가끔 뒷발로 서서 몸을 부풀리며 소리를 지른다 변심한 애인의 집을 찾아가…… 운운하는 주인공을 따라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운명극이 아니라 풍선 터뜨리기 놀이다 한번 터진 풍선은 다시는 터지지 않는다
2
슬로베니아의 동굴도룡뇽(Proteus anguinus)은 오천만 년 전 대륙이 갈라질 때 북미에 사는 다른 도룡뇽과 헤어졌다 이제는 눈도 잃고 피부색도 잃고 차가운 물에서 아주 조금만 먹으며 산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걸칠 옷도 없다 그의 속살은 아프다기보다 무섭다 그에게는 방귀도 신물도 제행무상(諸行無常)도 없고 소문도 곁눈질도 호접몽도 없다 그것은 비애극이 아니라 무성영화다 다른 도룡뇽들은 오천만 년 전에 그와 헤어졌다는 것을 잊었고 이제는 그를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첫사랑 ― 야생동물 보호구역 2」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누가 8:8)와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 사이에서 내 시는 위태로웠다. 소문(所聞)이란 숨기면서 풀이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숨은그림찾기 식의 글쓰기가 필요했다. 문제는 숨은 그림이 배경 그림보다 못났다는 데 있었다. 이걸, 싹 지워버려?
나는 악전고투, 악다구니, 악무한, 악바리 악돌이 악쓴다는 말이 좋다. 여기가 개똥밭이니 즐겁게 구르도록 하자, 악머구리처럼. 영원한 형벌이란 형벌의 이름으로 내리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영생이라니! 그러니 다람쥐여,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않는 동안은 네가 불멸이다.
“첫사랑이란 ‘사랑하다’가 최초의 기표로 단번에, 완전하게 주어졌을 때의 사랑이며, 그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의 계열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없으면서 있고, 없지만 있고, 없어짐으로써 있다.”―「몬스터 멜랑콜리아」에서
나는 이 시집이 없으면서 있고, 없지만 있고, 없어짐으로써 있으면 좋겠다.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
멜랑콜리아
너에게 가는 길에는 연약지반구간이 있었지 흰 스프레이로 윤관을 완성하기까지 나는 굳기름처럼 슬펐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 때, 뒤에서 오던 택시의 범퍼가 내 허리로 밀려들어올 때
나는 몇 번째 추간판을 지나고 있었을까? 마지막 달력을 뜯어낸 다음 텅 빈 여백처럼 나는 깨끗했네
옷을 벗고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옷을 입었지 계단은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하며 없는 중심을 감아 올라갔네
손을 대면 허리께에 뭉클한 네가 만져졌어 브래지어 자국은 나이테를 흉내 내고 있었네 그래,
중심은 언제나 뭉클했지 따라오던 택시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듯, 할증도 합승도 없이 지워지듯 나를 질러갔듯
기록보관소
―D구역
비닐로 채워진 부대자루
비닐, 하고 부르면 뭉클한 느낌이 목에까지 올라온다
그것을 랩처럼 너의 얼굴에 동여매고
여기까지 실어왔으니, 한마디도 못하게 하고
뚱뚱해도 무겁지 않고 버려져도 썩지 않고
그렇게 한 손으로 부렸으니,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다른 손으로 만졌으니, 손안에서도 손 밖에서도 뭉클한
우유 곽으로 채워진 부대자루
누운 벽수처럼 쓸모없는 것이 또 있을까
옆으로 누웠으니 저렇게 허연 침을 흘리지
제 안에 그토록 많은 빈 방을 허락했으니
허공도 네모반듯했으니
저 모로 누운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에 계신 여장군(女將軍) 생각이 간절하겠네
캔으로 채워진 부대자루
입을 열면 항문까지가 전부 멱이다
자갈해변에 자갈이 밀려오듯
자갈해변에 자갈이 쓸려가듯
온몸에 비명을 쟁여 넣었으니
아픔 바깥에서 저이는 몰지각하고
입을 동쳐 맨 한 손에 온몸이 매달렸으니
덩치 바깥에서 저이는 자잘할 것이네
종량제 봉투
나는 평생 화혼과 수연과 부의를 왕복하였다
네가 오면 입을 열고
네가 가면 입을 닫았다
너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하였으니
그래서 이토록 뚱뚱해졌으니
가정요리대백과
-밥상
1
너는 누구를 닮아 그 모양이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첫째는 발끈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놈의 집구석을 그냥, 확,
부드럽게 삶아서 찬물에 행구어 건진 다음 간장, 설탕, 참기름을 넣
어서 조물조물 비비고 싶습니다만
그건 당면 얘기고요 첫째는 제가 소금물에 데친 시금치라는 걸 압
니다 둘째는 아직 뻣뻣해서 당근, 셋째는 너무 어려서 계란지단이지죠
밥상은 얌전하고 일가는 단란합니다 깨소금으로 마무리되었거든요
그런데 잡채는 금방 쉬는 게 참 문제는 문제예요
2
첫째도 그렇지만 엄마는 둘째가 더 걱정입니다 아빠를 닮은 게 분
명하거든요 이 집 가장은 혼자서만 빛이 납니다
육십 촉은 되겠네요 유전 때문에 아빠는 오이처럼 민숭민숭하다가
미역처럼 풀이 죽었다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둘째와 아빠의 머리를 교대로 보면서 한여름 시원한 냉국
을 들이킵니다 그놈, 아빠를 꼭 닮았어, 그러면서요
둘째가 비뚤어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거기
에도 깨소금은 들어갑니다 냉국도 금방인 게 문제예요
3
아이더러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제발 묻지 마세요
그건 밥상을 엎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 초록색 스카프를 두른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