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경의 뼈
단양 역 지나
단성 역 네 평 대합실에는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국화 화분이 많습니다
정 중앙에 탁구대도 있고
연못도 있고
역기도 있고
자전거도 들여다 놓고
잉꼬도 두 쌍
늙은 쥐도 두 쌍
물고기도 두 쌍
살아있는 것들은 다 짝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上行 두 편
下行 한 편
열차 시각표 빈칸에는 적요만 도착합니다
역무원 두 사람이
물 끓는 난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희끗희끗 내리는 눈송이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속절없는 풍경 안에 넣어야 할까요.
2
인기척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3
시인들
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4
아무것도 아닌 슬픔
아이는 마당에 나와 흙을 집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흙을 털어넣습니다
아이는 꿀꺽 흙을 삼키고 나무 옆으로 기어가
나무허리에 자기 배를 문지릅니다
소화를 시키려는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웃통을 벗어던지더니
모래를 쥐어 얼마 안 되는 배꼽에 채워넣습니다
아이는 한참을 그러더니
그네에 앉아 거미줄을 올려다봅니다
감옥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맨살에 가 닿자마자 피가 솟구치는
지구 저편의 소란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물살에 호청이 흘러가듯 창문 너머
아무것도 아닌 한 아이가 소문을 씻어내고 있습니다
마알간 잔을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낯익은 무늬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이면지를 들어 허공에 비춰보면
복도의 물기들이 허공의 편입니다
나는 누구의 편이 되어본 적 없는데
숲도 숲의 편을 들지 않았는데
편을 먹어 땅을 넓힌 족속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놀다 간 자리를 들어 허공에 대보면
눌린 솜의 결들도 허공의 편입니다
포도주로 벌게진 얼굴을 허공에 대보면
잔을 드는 사이 퍼졌던 소문들도 죄다 허공의 편입니다
5
누(累)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뜩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6
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
三月
비워둔 화분에 고인 빗물이 자꾸 없어지겠구나
죽거나 살거나 하는 시간의 기록지 위에
또 한 사람을 눕히는구나
그대가 까마귀떼 맴도는 바람의 중심에
그 사람 입다 간 옷가지들을 걸었구나
오지 않은 봄마저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그대 모습이
저물 무렵 바지랑대에서 빛나는 속옷보다 더 희구나
四月
밤새 별과 그 사이의 어둠과
집을 찾지 못하는 것들이
뒤척이는 소리를 듣느라
너의 마음에 결석을 했네
헤진 角을 꿰매지 못하는 달 그림자와
번호를 지우며 잠을 청하는
나무들과 얘기를 하느라
한 무리의 짐승들이 떠나는 밤길에 동행하지 못했네
七月
가을엔 떠날 것이네
세상의 옷 벗은 나무들을 사진 찍어 주러
짐도 싸지 않고 그렇게 떠날 것이네
취기를 빌리지 않고 돈도 갚지 않고 갈 것이네
가을과 풍경 사이를 한눈 팔지 않고 직행할 것이네
바람 다음에 오는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네
八月
여름 내내 나를 데웠던 윗집 현악기 소리
내 살에 와 닿는 울림을 쳐내느라
천장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았네
더운 바람마저 혈관을 휘젓고 빠져나가는 날엔
누구나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했네
몸을 빠져 나오는 찌꺼기들과
쥐도 새도 모르게 갉아 먹히는 마음들,
그 더미 속으로 목쉬도록 빨려 들어가지 못했네
여름엔 지우는 일이 많았네
무엇보다 미워하는 일이
허무는 일이 많았네
十一月
마음의 등걸에 첫 눈이 쌓이네
바람 부는 날이 되어서야
기차 소리를 겨우 듣고
짤막한 확성기 소리에 밖이 궁금했네
누구도 만난 적이 없는 십일월,
누구라도 열쇠로 문을 따고
어둑신한 내 몸 뒤로 난 길
그 한가운데로 내몰아줬으면 했네.
7
전생에 들르다
내 전생을 냄새 없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았다면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고개를 드는 바람이었을 것이고
내 전생에 소리내어 사람 모은 적 있었다면
노인의 품에 안겨 어느 추운 저녁을 지키는 아코디언쯤이었을 것이고
그 전생에 일을 구하여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살렸더라면
사원에 연못을 파며 땟국 전 내력을 한스러워하는 노예였을 것이고
그전 전생에도 방랑을 일삼느라 한참을 떠돌았다면
후생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곳에 돌 하나 올려놓았을 것이고
하여 이 세상에서는 이리도 무겁고 슬프고.
8
한 뼘 몸을 옮기며 나는 간절하였으나
대문 앞에 내 놓은 짐들 위로 가랑비 내리고
박박 긁어모은 돈을 잠시 가슴 안쪽에 품어봤던 날
식초를 쏟았다
언제였나 이 집에 몸을 들인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
생각하고 생각해봐야
하나의 몸으로 와 하나의 몸 이루고 가는 게 고작인데
어찌 더 쓸쓸하라는 것인지 비워야 할 집에 식초를 쏟았다
겨울은 갔어도 여전히 겨울이었다
빈 집 마루에 손을 얹더니 이사한 곳까지 따라와
큰 짐승인 체하며 질컥이는 슬픈 냄새
그 먼 길 그토록 간절히 나를 따라와
내 목덜미 핏자국들을 치우는 고단한 냄새
냄새로 핥아 지우는 것이 내 허물만은 아니어서
서럽고 차가운 벽을 핥아 잇대으니
환해지고 채워진 듯 또 한 생을 펼칠 만도 하였다
나를 묻은 겨울 밤이었으나
달빛이 젖은 껍질 벗어 초 냄새를 덮는 봄 밤이기도 하였다
9
생의 절반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는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 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 밭일진데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 있을 몸뚱아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고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 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10
내 마음의 지도
자주 지도를 들여다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 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속을 헹궈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몸이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놓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을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 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거라 믿었다.
11
별
면아 네 잘못을 용서하기로 했다
어느 날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닌 잘못 보내진 메시지
누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데
한낮에 장작불 타듯 저녁 하늘이 번지더니
왜 내 마음에 별이 돋는가
왈칵 한 가슴이 한 가슴을 끌어안는 용서를 훔쳐보다가
왈칵 한 가슴이 한 가슴을 후려치는 불꽃을 지켜보다가
눈가가 다 뜨거워진다
이게 아닌데 소식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어찌할까 망설이다 발신 번호로 문자를 보낸다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보냈을까
아니면 이전의 심장으로 싸늘히 되돌려져
용서를 거두고 있진 않을 것인가
별이 쏟아낸 불똥을 치우느라
뜨거워진 눈가를 문지르다
창자 속으로 무섭게 흘러가는 고요에게 묻는다
정녕 나도 누군가에게 용서받을 일은 없는가.
12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月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에 나오는 한 구절.
13
견인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넘는 고갯길, 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 속, 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줄 수 없다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붓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쳐다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레카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닌가 싶었노라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 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 폭설의 기억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을 사랑도 분명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이가 아프다던 당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14
동유럽 종단열차
왜 혼자냐 합니다
노부부가 반절 호밀빵을 건네며
창 밖을 바라보던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야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 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정면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고 있던 사내가 아침 되어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니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거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 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이 얼어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로 가려면 이 칸에 있고
프라하로 가려면 앞 칸으로 가라고 차장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15
독毒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은
내 좌심방과 우심실 사이, 독毒 만드는 공원들은
다섯 명의 생산직과 대표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연구 및 관리직으로 구성돼있다
모두에게는 음독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독이 어디로 팔려나가는지
수출되는지 내수용인지 공원들은 알지 못한다
아주 늦은 밤 검은 개가 짖고 큰 차가 오고
셔터 소리 두 번 나면 독이 든 상자는 떠듬떠듬 날개를 단다
공장에는 실험용 흰 쥐 수백 마리가 살기도 한다
주사기로 실험을 통해 죽은 쥐들의 혀에서 감정을 빼내 다시 독을 만들어 개별포장하기도 한다
공원들이 만들어야 하는 하루 목표량은 독 30밀리그램으로
하루 아홉 시간 동안 어둔 창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양이라 한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독은 독으로서가 아니라
식용으로도 쓰여진다는 사실을 공원들도 대표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사시인 생산직 소년의 귀띔에 의하면
아주 미량의 독은 슬퍼지는데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16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오래 집이 싫어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17
화양연화(花樣年華)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콘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나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시인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한 개도 없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이 남자의 뚫는 내공이 어디까지야 하며, 숨죽인 채 따랐다. 화양연화에 도달해서야 휴休 한숨을 흘린다. 사실 맨 마지막 시를 발견하고서 이를 시안의 바탕으로 삼아 나머지 시편들을 읽었던 것! 무엇이든- 사랑, 그리움, 독신, 버려짐, 속태움, 기다림, 간절함, 슬픔 등- 지속가능발전하면 도道에 이르는 법이구나! 감탄을 던진다. 아마도 도인이 되었을까. 나중에 이 사람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시를 읽는 동안 내내 겨드랑이 임파선이 아팠다. 정말 부어올랐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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