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인희<돌아오지 않는 강> 외 1편

미송 2012. 5. 22. 09:09

 

 

 

돌아오지 않는 강*

 

눈 내리는 밤
하얗게 눈 덮인 순결한 대지 위에
차디차고 맑은 겨울강을 그렸네
소년은
불 꺼진 방 창문에 매달려
눈 쌓인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네


아무도 없는 유년의 방 창밖으로
소리 없이 흰 눈이 쌓여
모든 것은 기억의 세계로 흘러갔네


흰 떡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떡을 팔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흰 눈이 하염없이 내려
떡가루처럼 세상을 하얗게 덮던 밤


다시 돌아와
하얀 대지 위를 흘러가던
맑고 푸른 겨울강이 있었네.

 


*이중섭의 그림 「돌아오지 않는 강」

 

 

 

수직선, 그와의 간음

내 기억의 첫페이지에 자리한 흑백의 회화언어 한장
어린 나를 업고 젊은 엄마 울면서 산등성이 고갯길을 오르고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구불구불하고 하염없이 긴 황톳빛 산길
그 길은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었고
드디어 우리는
절벽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수직축에 매달려 있는 용어들이 적절히 배열될 때
마치 마술에 의한 것처럼 의미가 생겨난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절벽은 한 몸이 되고
그 둘은 하나의 수직선이 된다
절벽이 구원의 밧줄로 변하기를 기도하며
나도 흐른다
드디어 아버지도 흘러 한줄기 강으로 누우신다
강 언덕에 빨강 파랑, 노랑 보라....들꽃까지 피우시며

누가 강가의 푸른 풀밭에 앉아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것인가
누워버린 절벽에 걸터앉아 나는 쉰다
드디어 어머니를 젖히고
아버지의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

강물은 멈추지 않고
나, 내딸의 어머니가 된다
머지않아 나의 딸이 이 강언덕을 찾아내겠지
윤기흐르는 긴머리 찰랑이며
이 강 언덕에 앉아 있겠지
갖가지 색깔의 꽃들 사이에 피어난
새롭고 아름다운 그의 의미로

 

 

김인희 시인

1947년 경북 봉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1993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00년 문예진흥원 정보화 지원금 수혜
199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아담의 상처는 둥글다』
『별들은 여자를 나누어 가진다』
『여황의 슬픔』
『시간은 직유 외엔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석하지 말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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