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悅樂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 이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이 구절을 넌 이해할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이 평생 단 한 이 구절만을 썼다 해도 나는 그를 좋아했을 거야.....라고, 라고 쓰다가 나는 문자메시지를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래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것은 운명이다! 좋은 여행 되기를!"
2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했더라구."
3
나는 여행가방 안에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끼워넣었다. 아마도 밤을 지새운 탓에 비행기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지겠지만. 그러므로 나는 그 책을 굳이 다시 읽기 위해 지니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속의 구절들, 이를테면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리자베타, 나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닷물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에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그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나 혼자만의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라는 그의 약속을
지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지영<맨발로 글목을 돌다> 45-48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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