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 - 박양근
자연은 계절에 맞추어 변해간다. 산천초목과 사람이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사는 것은 당연한 섭리라지만 문화현상도 천체의 운행이 있어 다채로워진다.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지혜도 그만큼 깊어진다. 상상의 수레를 탄 문학인들, 만상이 불변이라면 얼마나 단조로울까싶다.
요즈음 나는 한국과 다른 계절 속에서 산다. 적도 아래쪽에 자리한 호주에서 역계절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한국이 봄나라일 때 이곳은 가을나라다. 어느 쪽이 앞서 가는지는 모르지만 한 곳에서 산수유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 때 다른 곳에서는 나무가 붉게 물들고 꽃잎이 속절없이 떨어진다. 봄맞이 축제가 베풀어진다면 가을 별빛이 쏟아지는 이곳의 파크에서는 야외 교향곡이 퍼져나가기도 한다. 꽃이 피면 잎이 지고, 비가 뿌리면 눈이 내리는 순서는 알지만 그런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대성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헌데, 나는 하루 동안의 비행시간을 거쳐 반전된 시공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살고 있는 애들레이드는 교회가 유달리 많다. 하지만 원주민인 아보리지언의 터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시림이 우거진 애들레이드 언덕과 잡풀만이 번식할 수 있는 황무지 고원 사이의 널찍한 평원은 옛 원주민들이 살기에는 안성마춤이었겠다. 평원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10미터 남짓한 폭의 토렌즈강변에 열대거목과 온대나무가 즐비한 풍경을 바라보는 맛으로 객지생활을 견딘다고 할까. 유달리 찬 가을공기를 마다하고 새벽산책을 걸르지 않는 이유도 토렌즈강의 사계절에 매료된 때문이라고 스스로 여긴다.
수면 위로 부챗살이 펼쳐진다. 삼각 꼭짓점에 얹힌 작은 물체가 다가오면 쇠오리의 울음소리가 한결 뚜렷해진다. 연이어 부챗살 파장을 고리에 단 오리들이 사방에서 모여든다. 반대편 둑에서 물살을 차며 달려오는 성미 급한 녀석들은 숲과 강에 동화되어 눌러 사는 바다 갈매기들이다. 갈색, 흰색, 잿빛, 청색, 검은색. 제 각각의 물새들이 뒤뚱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 저네들이 토렌즈강의 주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오리들이 다가오는 게 처음에는 꽤나 신기했다. 먹이를 얻어볼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라고 짐작하지만 낯선 사람의 접근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내가 순한가라는 자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보살펴준 토박이 주민들 덕분에 물갈퀴 없는 나마저 믿어준 선심을 베푼 것이다. 잠시나마 내 처지를 부풀렸으니 참으로 계면쩍은 일이다.
배울수록 제 멋으로 살고, 가진 사람일수록 제 식대로 행동하려 든다. 요즘 유행한다는 웰빙 처세가 그것인지는 모르나 좁은 억지에 불과하다. 오리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결국에는 인간이 저지르는 오만한 해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어느 집단이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놈이 반드시 끼어있다. 잠자코 기다리면 먹이 차례가 돌아올 텐데 다른 동료들이 먼저 먹을까봐 등을 쪼며 훼방을 놓는 오리가 보인다. 한 눈에 보아도 덩치로는 두목감이지만 하는 짓으로는 지도자감이 아닌 듯하다. 영악할 만큼 눈매를 반질거리며 다른 녀석들을 쫓느라 극성을 부리지만 던져준 먹이는 다른 오리의 차지가 되거나 새끼오리가 날렵하게 받아먹기도 한다. 위세를 부리는 그놈이 동료뿐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도 멸시를 받는구나 생각하면 조금은 측은해진다. 그렇다면 그런 부류의 사람은 누구의 폄훼와 연민을 받을지 자못 궁금스럽다.
사람 사는 곳이 오리사회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부쩍 하게 된다. 우두머리로 행세하는 경우에 비하여 묵묵히 제 몫을 감당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 튀어야 인기를 얻고 이미지를 깔아야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판세가 오리까지 전파된 건 아닐까. 저 못난 오리도 사람의 흉내를 낼 뿐이라고 여겨본다.
산책시간이 넉넉하면 벤치에 앉아 쉴 때도 있는데 오리가족을 지켜보는 재미가 붙어서다. 네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오리부부가 새끼를 키우는 중인데 여린 잔디를 뜯어먹는 소리가 산 속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만큼 신선하게 들린다. 아비오리는 앞에서, 어미오리는 뒤에서 제 혈손을 지키는 자세가 더 없이 믿음직스럽다. 처음에는 낯선 침입자에게 목덜미를 곤두세워 힘을 과시하더니 몇 번 대면하고서는 경계심을 풀어 주었다. 지금은 힐끔 쳐다볼 뿐, 내 존재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해코지할 짐승은 아니지만 사귈만한 감도 아니라고 판단해버린 모양이다. 간혹 먹이를 주면 잠시 알았다는 눈길을 보내는데, 영어 격언에 "Food makes friends."가 있듯이 잘해주면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듯, 먹이를 얻어먹으면서도 당당하기가 사람보다 낫다. 베푸는 상대가 좋기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오리들에게서 그런 환대를 받기만 하여도 나는 그저 행복해진다.
토렌즈강에는 지금 짙은 가을이 흐른다. 무청보다 푸른 잔디와 열대수종은 변함이 없지만 느티나무와 포플러는 가지를 이미 드러내었다. 한참 있다보면 은은히 유클립투스 향기가 내 몸을 감싸는데 이 나무는 고목이 되면 백옥보다 매끈한 흰 속껍질을 드러낸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육신이나 마음이 거칠어질 따름인데, 하얀 속질을 드러내는 나무의 연륜에 눈이 부셔진다. 자연식물원이라고 할 강변에서는 지금 은빛 갈대꽃이 한창이다. 갈대라는 이름만으로도 낯익은 강변과 가을 갈대숲이 떠오르면서 참으로 멀리 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제는 경이로운 것을 만났다. 매일 나서는 산책길인데도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아.
주.
까.
리.
순간 고향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곱 잎사귀를 뻗치며 적막한 여름 한낮에 멀뚱하게 마을 입구에 버려지듯 서 있는 아주까리였다. 겸연쩍을 정도의 큰 씨앗주머니를 달고서도 보란 듯이 뻗대던 그것은 가을 뒷산을 갈아만든 밭을 지키기도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을 묵정밭에서 홀로 자랐다가 겨울삭풍에 사라질 들풀로나 남아있을까. 그 일년짜리 생명이 여기선 다년생으로 자라고 있는 중이다.
기.죽.지.않.고.
씨가 떨어진 땅에서 어린 아주까리가 오종종하게 자라고 있다. 무엇을 보느라 이제야 내 눈에 뜨일까. 신기하다는 이유로 아열대꽃에 홀려 죽을힘으로 생존의 뿌리싸움을 벌리는 아주까리를 보지 못했다. 외로우면 옛 것이 그립고 힘에 부치면 지나간 아픔도 아쉬워진다더니, 녹음방초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아주까리를 지켜보며 피마자를 마시던 배앓이 시절을 떠올린다. 뒷산에 핀 진달래도 구경하지 못한 채 오늘도 논밭으로 나설 귀먹은 덕식이 아재의 굽은 허리가 까슬하게 마음을 긁는다. 그냥 이름뿐인 고향과 집안을 지켜내는 두 존재를 떠올리며 나도 조그만 반도의 흙으로 자란 풀인가 싶어 한걸음 다가서본다.
오늘도 토렌즈 강변을 걷는다. 들풀 한 포기, 물새 한 마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들이 내 곁에 서 있는 이유는 아직도 얕고 좁은 마음의 통로를 넓혀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지구의 한쪽에서는 5월의 꽃망울이 팍팍 터지는 날, 나는 돌아오는 토렌즈 강변에 선 굴피나무에서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주워 올린 도토리를 두 손으로 받쳐 쳐다보며 지금 이루어진 작은 만남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떨어지는 몸짓으로 보여주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을소나타처럼 서늘하다.
혹여 생전에라도 가 본적 없었을 것 같은 토렌즈강변을 방금 거닌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수필의 유려流麗함 속을 통과한 자연과 화자의 호흡이 또 하나의 자연을 낳고, 독자는 현재의 삶을 그 이야기에 어슷비슷 기댄다. 어제 본 내 주변의 자연풍경을 저 폭신폭신했고 어쭈구리했을 투영에 재 투영한다. 바쁘게 읽고 돌아설 독자에겐 쉽게 얻은 듯 한 한 점 진풍경이나, 화자이자 필자인 자신에겐 필경 오래된 사유와 관조로 낳은 작품일 터. 중요한 건, 시공을 넘나드는 공감각적 체험이 이 순간 재발되었단 것.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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