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병권<숨어서 피는 꽃>

미송 2012. 6. 28. 07:15

숨어서 피는 꽃 - 김 병권

 

우리집 정원에는 지난 1년 동안 시들했다가 생기를 되찾은 수국 한 그루가 있다.

나는 꽃나무의 생리를 잘 몰라 별로 손질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 수국은 지난해 삿갓 모양의 넙죽한 향나무 밑에서 호된 홍역을 치뤄 하마트면 죽을 뻔한 것을 아내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옮겨심어 가까스로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꽤 싱싱하게 자랐는데도 다른 집의 풍성한 수국보다는 포기가 적고 나이는 그럭저럭 5년째로 접어든다. 다른 수국 같으면 벌써 꽃송이가 만발했을 때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한송이 피었는데 그 꽃의 빛깔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빛이었고 그 크기는 제법 밥사발만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겨우 한송이 핀 꽃이 올바른 제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무성한 잎새에 가려진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어 사람의 손이 잎새를 헤쳐주지 않고는 눈에 띄기조차 어려웠다. 옆에 있는 옥잠화·실비아·채송화·장미·목단·국화 등이 저마다 요염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데 비해 혼자 외로이 외면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측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꽃들과 미색을 다투지 않고 홀로 잎새 속에 숨어서 피어있는 자태는 사뭇 고고하기까지 했다. 꽃나무도 감성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해 여름 그 홍역을 치른 후 제 나름으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탓인지 저렇듯 자신의 모습을 움추리는 겸허 속에는 꼭 까닭이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피어있는 뭇꽃들이 화려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쓰임은 저 무성한 잎새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저마다 난 체 하려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씁쓸한 현대인의 경박한 생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 앞에 와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도야하는 은자의 교훈을 느끼게 된다.

 

정금미옥(精金美玉)은 반드시 열화 속을 거쳐 단련되어야 이루어지듯이 죽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쇠붙이나 돌덩어리보다도 약한 자신인 줄 안다면 어찌 함부로 고개를 쳐들고 교만을 피울 수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온상의 화초처럼 길러져 강한 햇빛만 받아도 시들해 지는 저 모든 꽃들이 어찌 신산인고(辛酸忍苦)를 다 겪은 수국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랴 싶다.

 

나는 문득 '늙은 학은 아무리 굶주렸어도 식음이 오히려 한가하니 어찌 닭이나 집오리처럼 아웅다웅 먹이를 다투랴!' 하는 옛 현인들의 명구를 뇌이면서 저 수국의 겸허한 모습에 학의 고고한 자세를 느끼기까지 했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보아도 채송화나 분꽃이나 나팔꽃처럼 너무 예민하고 직설적인 것 같다. 참 인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닌데, 좀더 은인자중(隱人自重)하여 인생을 관조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저 수국으로 하여 더욱 절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밝은 태양이나 촛불도 실은 스스로 숨어서 몸을 태우고 있는 것이지만 그 덕망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다 보니 저렇듯 만물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이 아닌가.

 

득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도 이와 같아 옛 선비들도 숨어서 도를 닦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그 빛이 번져 나가는 데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은자였던 저 유명한 강태공이나 제갈량 같은 이의 입신양명도 이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처세에 급급한 나머지 항시 초조와 불안에 쫓기는 현대인의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공식적인 스케줄에다 빈틈없는 각본으로 연출해야 하는 나날 속에 휴식마저 강박관념에 얽매이다 보니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가 없다.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각종 노이로제 우울증 정신질환 속에서 현대인의 심신은 몹시 지쳐있다.

 

생활의 여유, 이는 반드시 바쁜 일에 쫓긴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동중정(動中靜)'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의 여유를 지닌 사람은 저 시끄러운 광장의 한가운데서나 포화가 들끊는 전장 마당에서도 오히려 한가한 마음을 가꿀 수 있다. 이러한 심경의 취사는 자기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한가로운 마음의 경지를 이룩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사물의 심부름꾼 노릇밖에 못하여 결국은 자아상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진실로 큰 일을 하려면 사물의 바깥세계에 서서 사물을 볼 줄 아는 경륜을 닦아야 할 것이다. 잎새에 가려지고 고개마저 떨구고 있는 한송이 수국 속에서도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철리(哲理)를 느낀다면 비록 번잡한 곳에서 시달리고 있더라도 마음은 털끝하나 물들지 않는 쾌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1981년 9월 <시와 시론>

 

 

 

다소 교훈조의 어투라서 큰 매력을 느낄 순 없지만, 5년 전 스스로가 저장해 둔 흔적에 다시 눈길을 두어 본다. 교육학자 플루타르코스의 명언 속에 '도야'란 뜻을 재검색하다가 나의 옛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런 류의 일은 종종 우연한 아침처럼 신기하게 느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좀 더 깊이 '들어가기' 하는 내 안의 명상과 회고와 순간순간의 반성은 이렇듯 사실, '나'(또 다른 이름의 他者)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행사. 과거의 기록들이  창의가 아닌 모방과 필사에서 그쳤다 하더라도 정지된 한 시간 속에서 또렷한 현실처럼 다가옴을 느낄 때, 그것을 '생생하다' 표현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한 편의 수필도 한 송이의 수국도 꽃에 투영되었던 작가의 마음도 독자의 시간과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진화가 되었든 퇴화가 되었든, 중요한 건 소란을 떨지 않아도 '이어 말하기'가 가능해진 내 안에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가마귀 - 에드가 엘런 포우  (0) 2012.07.14
김종삼,「라산스카」   (0) 2012.07.03
박양근<봄날에 켜는 가을소나타>   (0) 2012.06.20
반역의 시계 - 박양근  (0) 2012.06.18
방민호의 시편들  (0) 201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