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향계의 기억 / 오정자
새의 부리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길 가르쳐 주는 양철손가락
바람의 외출을 너그럽게 대변해 주던 화살표 끝없는 움직임은 한 곳으로 정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미세한 바람에도 반동(反動)했던 회심의 내 이력에는 자력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던 정지 속 탐색을 천형이라 부르고 있다 고독한 회전의 운명을 사랑이라 말하고 있다
<시작노트>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에도 자기 몸을 떨어야 하는 풍향계는 움직임을 그 생명으로 한다. 움직임에 예민한 촉수를 가졌지만 자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 하반신 불구. 타자의 길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은 한걸음도 이동할 수 없는 풍향계의 존재론적 비애.
<감상>
삶이 깊어지면, 천형(天刑) 같은 그의 문학도 그 삶을 따라서 깊어진다던데... 그래서일까? 한참을 머물게 된다. 기억을 더듬자면, 이 詩에 대해 某 시인이 올렸던 감상글을 보다 못해 시인이 나중에 자신의 <시작노트>를 추가로 올렸던 것인데(아마도, 시인의 생각에 핀트가 어긋난 감상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하긴, 讀者가 자신의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시인은 따분하다 할밖에 없을지도.
시인의 입장은 평자, 혹은 (廣義의) 독자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그런 경우에 자신의 작품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독자나 혹은 평자(評者)를 위해 구차하게 설명까지 해야 할 바지런함은 떨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기 작품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을 것인데......시인의 친절한(?) <시작 Note>를 통해서 편안한 감상을 하니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이라 할까? <안희선>
2000년도 '작가들'이란 잡지에 실렸던 한국 평론가 류신의 <아르고스의 눈>을 읽고, 또 그 안에 인용된 세 편의 시를 힌트로 패러디한 시. 엄격히 말해 나의 시가 아니거나 짜깁기 수준이다. 까칠한 변죽을 탓하지 않고, (어인 일로) 친절 운운한 감상자는 그 내막과 도둑년 심보를 아시길. 말이 나온김에 덤(?)으로 원본의 시 한편을 붙이기 한다. 시인 페터 빌의 <풍향계>이다.
우리 풍향계들은
양철손가락을 달고
재빨리 몸을 돌린다
순풍을 타고
색깔을 바꾸면서
삐꺽 삐꺽 쇳소리를 낸다
어떤 바람도 우리를 내밀지 못한다
이 자리에 녹슨 채 그대로 있다.
페터빌의 풍향계를 평론하면서 한 편의 평론으로도 강한 인상을 주었던 '다성多聲의 시학' 류신은, 뇌리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좋은 시가 항용 그러하듯이, 이 시 또한 시인의 전언을 생략하고 암시만으로 그 나머지 이야기의 완성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시인에 의해 은닉되고 변화된 텍스트를 찾아내어 풍요로운 담론 창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페터 빌의<풍량계들>은, 시는 생략함으로써 독자를 유혹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예라 하겠다. 그리고 이런 생략을 통해 개진되는 해석의 다각적인 확산은 다시 하나의 발진지로 모아질 수 있다. 이 시의 복합적인 의미층위를 관통하는 뼈대는 하나이다. "어떤 바람도 우리를 내밀지 못한다."는 전진 없는 공전! 누구나 풍향계의 거죽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풍향계의 골수를 취할 만큼 심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흔적을 다시 읽자니, 공전(空轉 revolution)의 의미가 다가온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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