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십자가 / 오정자
깨달음을 믿지 말라 이정표일 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부르는 순간 그는 우상이 된다
이름의 권위로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은 현재진행형
길 걸어가는 저 사람의 모자 위에
또 모자를 씌우지 말라.
모세가 불길에 휩싸인 떨기나무 아래서 신의 정체를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불길 속에서 들려온 대답은 “나는 나다! (I AM WHO I AM)”이었다. 즉 나는 존재 그 자체라는 말이었다. 오 시인의 <녹슨 십자가>의 사유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시의 분수령으로 삼는다.
/이름의 권위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란 언어다. 신은 인간의 언어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인간들의 언어에 대한 불신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뜻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태초의 말씀이란 인간의 이성에 비친 언어를 넘어선 존재 그 자체의 빛(로고스)이 아닐까. 요한복음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니 말이다. 구차한 인간의 언어를 떠난 그 빛을 일컬어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무엇은 현재진행형/
인간의 언어로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 설파되었다. 노자는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도(道)가 아니다, 이름을 붙이면 늘 그 이름이 아니다, 라고 서두를 시작했고, 석가모니는 긴 설법 끝에 제 말을 다 거둬들여 설법을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설법 자체도 없다며 끝장을 냈고, 프로이트를 계승한 자크 라캉은 언어로 구성된 상상계를 넘어선 현상계,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정신분석학에 도입하여 인간정신을 해부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모세의 시대로 돌아가 궁극의 원리에 접근을 시도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부르는 순간 그는 우상이 된다/
시의 맥락으로 봤을 때 사실 하나님이 뭐요? 하고 물으면 구차하게 이런저런 성경구절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 딱 한 마디로 끝낸다. “존재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이기에 먼 옛날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여 강물처럼 흐르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는, 시인의 말처럼 신은 늘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하나님이 날린다. 예수님이 날린다. 스스로 존재라고 말했던 신이 거리의 좌판에서 이상한 이름이 붙여진 상품으로 거래가 된다. 인간은 늘 신을 지상에 끌어내려 욕되게 하였고 갖은 모욕을 퍼부었으며, 소수의 권력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처참하리만큼 이용했다. 이것이 유구한 종교의 역사며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회의를 품는다. 신에 대한 회의가 절대 아니다. 신을 팔아먹는 성직자들에 대한 불신과 회의인 것이다. 신학을 전공했고 20년 이상 선교활동을 해왔던 시인은 추호의 방만함도 허용치 않아, 심지어 정직한 성직자에게마저도 칼날을 들이댄다.
/깨달음을 믿지 말라 이정표일 뿐이다/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다. 모든 종교의 오욕과 부패는 교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신이 내린 여호수아의 계시는, 오늘날의 세태에게는 이렇게도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은 순수하였으나 나중은 부패하리라.”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그렇다. 처음에는 참으로 좋았다. 존재 그 자체를 느끼며 그 속에서 즐거워하다가 어느 날부터 그는 존재(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어(세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스스로가 신이 되려한다. 최소한 신의 대리인(우상)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신은 이미 인간 모두에게 존재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신은 언어로 표현되어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물건이나 우상이 아니기에 항상 그런 모습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바로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그래서 신은 늘 우리와 함께 하여 그 삶 속에서 무늬를 드러내지나 않을까,
/길 걸어가는 저 사람의 모자 위에
또 모자를 씌우지 말라/
온갖 언어를 집어 치우자. 그것은 우상이고 <녹슨 십자가>일 뿐이다. 인간은 모자를 쓰고 가는 신에게 또 모자를 씌우려 한다. 예수가 이렇게 말했던가,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 이 말은 나를 팔아먹지 말라는 뜻이겠다. <이정문>
저는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이 시에 접근했습니다만. 즉, 시에서 원용한 종교적 명칭(하나님, 예수님)은 껍데기 뿐인 현상現象으로 부터 實相의 본질本質로 접근하기 위한 詩的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해설을 접하니 종교적 측면에서도 깊은 思惟를 격발激發한다는 점이 뒤늦게 짚히네요. (꼭이 특정종교에 국한해서가 아닌) 뭐, 결론적으로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 다를 뿐 결과에 있어서는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인간의 언어로 부풀려지면, 그것은 더 이상 본질이 될 수 없음을. (다만 정 시인님은 시의 본질에 접근할 때 고속도로를, 저는 비포장도로를 이용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 안희선 시인
버튼만 누르면 똑같은 소리에 똑같은 미소. 똑같은 의식들이 반복된다. 조작되고 공회전되는 말. 침묵을 불러내려다 흩어지는 말들. 이토록 지루한 트러블 속에서 가지런히 한 곳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 충격이다. 20110602-20230420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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