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화급하여 즉흥적인 말

미송 2017. 12. 10. 10:18

 


▲ 에곤 실레, 추기경과 수녀

 

 

화급하여 즉흥적인 말 / 오정자

창문을 여니 아침
아침이라 창문을 연 건 아니네
사각물방울들 시야에 세워진 바깥
죽기 전 꼭 한 번 바다에 가보고 싶다던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던 내 소설 속 남자*의
거짓말 같은 대사가 휙 지나네
나무가 보이지 않네 새소리가 들리네
반듯하고 동일한 문들이 여기저기로 날 분해해 갔던
이름 모를 블로그들이 간직했을 이름
클릭 클릭했던 내 이름이라도 이젠 누구의 것도 아니네
아파트 회색 입들이 아직은 조용하네
불교에선 지옥을 뭐라고 불러 응
그냥 지옥 지옥도 여러개야 그럼 방도 많겠네
희한해 난 너무 밝아 좀 밝히지
걱정 마 해도 밝히는걸 뭐
저녁 무렵 밤 미명 동트는 얼굴
다 좋아해 하루 동안 찰깍 1초 동안
사계가 우당탕 서늘하게 지나가네
아침이라 창문을 연 건 아니지만
아침이니 지옥이란 단어도 떠오르네
아이로니 아이러니 오우 발음이 어정쩡한
어이 하는 소리보단 훨

 

*영화 Knockin' on Heaven's Door  대사

 

 

詩가 일상의 삶과 멀찌감치 거리를 둔다면 그것처럼 맥 풀리는 일도 없을 터 (근데, 요즘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거룩한 심오한 어조의 詩들이 너무 많아서 읽다가 맥 풀림) 생각하면, 우리네 삶에서 화급하여 즉흥적으로 나오는 말들이 그 얼마나 많던가? 이 장면에서 문득,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도 떠오른다
"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 머릿속에 가득 기분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 

때론 오히려 여과없이 담백 진솔하게 말해지는 것에서, 그 즉흥적인 言語의 기분 좋은 울림 속에서, 가식없는 삶의 모습을 만나기도 하는 것. 나 역시, 가끔은 있는 그대로, 말하고픈 걸 내숭없이 하고 싶어진다 (그 무엇인 척은 하덜 말고) 특히, 화급하여 즉흥적이 될 때엔 에누리 없이. <안희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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