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가 아니다
한양대 교수로 직장을 옮긴 1980년대 초 밤이면 김일성이 자신의 집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지붕 위엔 낯선 비행기가 떠 있다고 편지를 보낸 제자가 있었다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에 실패한 그는 대학 시절 서울 집으로 간다며 철길을 계속 걸어간 적이 있지 어느 날은 그의 시집을 영국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선생님이 평론을 쓰셔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
그 무렵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연구실 문을 열고 웬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서른 정도 나를 보더니 대뜸 선생님이 불쌍해요 그가 한 말이다 잠바 차림에 무언가 들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시를 공부하는 청년으로 선생님 생각이 나서 도시락을 싸 왔다며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풀었다 그때 조교들이 들어와 그는 조교들과 함께 나갔지 1980년대 초엔 왜 이런 일들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진료청구서
석달마다 한대병월엘 간다 오전 열시 먼저 5층 수납계로 가서 진료청구서를 쓴다 여직원은 청구서와 의료보험증을 받고 컴퓨터를 두드리며 말하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예약이 돼 있어요 난 6층 내과로 올라간다 석달 전에도 그랬지 이 박사에게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오전 열시 난 또 5층 수납계에 가서 청구서를 쓰고 여직원 말은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예약이 돼 있어요 그러나 석달 후에도 오전 열시 난 다시 5층에 가서 진료 과목, 담당 의사, 신청인, 주민번호 등등 청구서를 쓰고 여직원은 말하겠지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예약이 돼 있어요 예약을 하면 청구서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언제나 그걸 잊고 난 또 5층 수납계에 가서 청구서를 쓴다 이만 하면 세상은 살만 하지 않은가?
우박
정민이는 그년의 이마에 소고기라고 쓰고 정민이는 국문과 2학년 남학생 그는 키가 작고 스님처럼 민머리다 그가 낸 시의 제목은 소고기 그는 그년의 이마에 소고기라고 쓰고 다시 지우고 소고기는 맛이 있지만 소고기가 무슨 죄야? 라고 썼다 내가 우박을 맞은건 그때 그의 시를 읽을 때 갑자기 우박이 떨어지고 우박 속에서 나는 그에게 말했지 그년을 그녀로 고치라고 그러나 우박을 맞으며 한 소리다 우박을 맞으며!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
오전엔 깃이 없는 회색 셔츠를 입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지 면도하다 말고 갑자기 추워 골방 구석에 처박은 스웨터를 갈아입고 다시 면도를 하지 오후엔 다시 회색 셔츠를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지 이 셔츠는 아내 몰래 내가 깃을 잘라버린 것 저녁이면 다시 스웨터로 갈아입는다 날씨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한기가 오면 스웨처를 입고 열이 나면 회색 셔츠를 입고 앉아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아들이 물었지 아버지 셔츠가 왜 그래요? 응 내가 깃을 잘랐어 목에 자꾸 닿는 게 귀찮아서 아들은 대책이 없다는 표정이다 셔츠를 입으면 한기가 오고 스웨터를 입으면 열이 나고 다시 옷장을 뒤진다 옷장에 처박힌 여름 티셔츠를 꺼내 입는다 난 지금 티셔츠를 입고 이 글을 쓴다 그러나 저녁 여덟시 반 거실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실 때 처음엔 회색 셔츠를 입고 앉아 마시다 스웨터를 갈아입고 다시 여름 티셔츠를 갈아입고 앉아 마신다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이는 봄밤!
바람 부는 날
김춘수 선생님 전화야요 난 아내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는다
가을 오후인지 겨울 오후인지 기억이 안 난다
선생님 목소리다 그러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난 수화기를 놓고 말했지
이상해 돌아가신 선생님이 어떻게 전화를 했을까?
아마 누군가 김춘수 선생님이라고 속였을 거야요
아내의 말이다 아니야 선생님 목소리가 맞아 도대체 알수 없군
돌아가신 선생님이 전화를 하다니! 난 오늘도 꿈을 꾼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다
난 시골에 하루 더 묵기로 했지만 갑자기 서울 아파트가 걱정되어 버스를 탄다 하루 더 묵고 가게! 친척들이 말하고 난 아파트가 비어서 그래요 일단 가서 3층 남자에게 부탁하고 올게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른다 아내는 내일 떠난다고 미국에서 전화를 했지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내린다 밤이다 3층 남자가 셔츠 바람으로 베란다에 서 있고 난 그를 쳐다보며 말했지 1층 아파트를 부탁한다고! 그러나 그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 좀 기다려요 올라가서 말씀드릴게요 난 출입구로 들어간다 그러나 내가 사는 1층 아파트 문 사이로 불빛이 비친다 이상하군 난 문을 연다 거실에 불이 환하고 아내가 앉아 있다 석준이 호준이도 있다 난 너무 놀라 아니 내일 온다고 했잖아? 이걸 꿈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흔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1층이 아니라 3층이다
가방을 먹다
가방이 나를 먹기 전에 내가 가방을 먹어야지 그래야지 그래야지 가방을 먹어야 가방은 도망가지 않을 거야 가방이 도망가기 전에 내가 먼저 가방을 먹자 난 가방을 먹는다 겨울 저녁 한번 더 생각해봐! 가방이 중얼댄다 난 가방 속으로 들어간다 끔찍한 기근이로군 지나가는 신사가 말한다
내 인생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떠오르는 대로 말하시오 당신은 명령하고 난 긴 의자에 누워 내 인생에 대해 말한다 내 인생 내 인생 내 인생은 어디 있는가? 내 인생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프랑스 시인 끄노도 비슷한 말을 했지 난 책상에 대해 할 말이 없고 이 흐린 봄에 대해 할 말이 없고 긴 의자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떠오르는 대로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명령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 인생을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자유연상도 속인다 도망갈 길은 없지 결국은 모두가 환상이야 나도 당신도 이 긴 의자도 어쨌든 난 할 말이 없다 인생에 대한 저항인가? 아직도 저항해야 할 인생이 남아 있는가? 흐린 봄 긴 의자에 누워!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전혀 없다
이건 무료해서 쓰는 시 무료해서 무료해서 쓰는 시야 하염없는 시 낮잠 자고 일어나 쓰는 시지 나는 광대 무당 교수 알콜 중독자 팔 병신 정서 불안증 환자야 난 시인이 아니야 환자의 말을 옮기는 거지 사는 게 무료해서 시도 무료하지 그저 옮기는 거야 난 숫색시가 아니야 시인들은 목소리만 들려주고 얼굴이 보이지 않네 도대체 그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돈은 어떻게 버는가? 시 속에 그들은 없고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만 있지 그러나 난 달라 거리에 비가 오면 시 속에서도 비가 오지 시인들은 감추고 난 드러내는 거야 있는 그대로!
서정시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타자를 모르고 서정도 서정도 허위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갈 데는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지금 책상에 날아와 앉는 파리처럼 갈 곳이 없고 어젯밤 인제에서 돌아와 혼자 마시던 맥주처럼 갈 곳이 없고 잠결에 날아오던 모기처럼 아무리 아무리 쫓아도 날아와 내 팔을 물어뜯던 모기처럼 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갈 데는 무수하다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2007)
"나는 시가 싫어서 시를 쓴다. 쓸 것이 없는 시, 시 되기를 거부하는 시.
"우리 시대, 독보적인 모더니스트인 이승훈 시인이 열다섯번째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세계사)를 펴내며 들려준 시론이다. 다소 알쏭달쏭한 이 말에는 시의 본질이 없는 바에야 시인이 시에 갇히기보다는 차라리 시를 해방시키자는 숨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어떻게 해야 시도 시인도 함께 해방될 수 있을 것인가. 가령 이런 시. "김춘수 선생님 전화야요 난 아내가 준 전화를 받는다 (중략) 이상해 돌아가신 선생님이 어떻게 전화를 했을까? 아마도 누군가 김춘수 선생님이라고 속였을 거야요 아내의 말이다 아니야 선생님 목소리가 맞아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돌아가신 선생님이 전화를 하다니! 난 오늘도 꿈을 꾼다."('바람 부는 날' 일부)그는 꿈에서 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꿈에는 어떤 논리도 필요치 않다. 거리도 시간도 상황도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든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지워지고 없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꾼 꿈이었기에 내가 꿈을 꾼 주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꿈에 의해 꿈을 꾼 '모르는 주체'와 만날 뿐으로, 그 '모르는 주체'가 가끔 현실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중략)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지금 책상에 날아와 앉는 파리처럼 갈 곳이 없고"('서정시' 일부)그는 삶을 초월하는 어디 머언 곳에 이슬처럼 순수한 진리가 있다고 믿는 시인들을 위선자로 치부하며 이렇게 강변한다. "시 따로 놀고 인생 따로 노는 위선자들은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 우리 시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 하기야 이런 인간이 어디 시인들 뿐이랴? 시인들 가운데 가짜도 많고 물론 나도 가짜지만 나는 최소한 내가 가짜라는 건 안다."
국민일보|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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