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정호승<끈>외 5편

미송 2012. 9. 17. 08:21

 

가는 발목에 끈이 묶여

날지 못하는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에 가차없이 차이는

푸른 하늘조차 내려와 도와주지 않는

해가 지도록 오직

푸드덕푸드덕거리기만 하는

한 마리

저 땅 위의

 

 

부러짐에 대하여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은 무엇으로 집을 지울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울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하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스테인드글라스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끓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을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돌멩이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누가 또 고요히

말없이 소리치면

내가 가장 먼저 힘껏 돌을 던지려고

늘 돌멩이 하나

손에 꽉 쥐고 길을 걸었다

어느날

돌멩이가 멀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나를 향해 날아와

나는 얼른 돌멩이에게 무릎을 끓고

빌고 또 빌었다

 

 

유등

 

등불 하나 강물에 떠나보내지 않고

어찌 강물을 사랑했다 하랴

강물에 등불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어찌 등불을 사랑했다 하랴

떠나가지 않으면 떠나보내리라

흘러가지 않으면 흘려보내리라

강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외로운 술집이 되어 가슴마다 술 마시는 밤

밤하늘을 헤엄치는 푸른 물고기들이

떼지어 강물에 뛰어내려 등불의 길을 따른다

부디 흐르는 강물에 말을 꽂지 말아다오

누가 무너지는 촉석루를 껴안고 울고 있는가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떠나가는 사람은 떠나가게 내버려두고

유등(流燈)이여

그대 별들과 함께 가서 죽는 곳은 어디인가

나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지막 남은 등불 하나 바다에 바치리라

 

 

낙죽

 

결국은 벌겋게 단 인두를 들고

낙죽(烙竹)을 놓는 일이지

한때는 산과 산을 뛰어넘는

사슴의 발자국을 남기는 줄 알았으나

한때는 맑은 시냇물의 애무를 견디다 못해

그만 사정해버리는 젊은 바위가 되는 줄 알았으나

결국은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마른 대나무에 낙을 놓는 일이지

남을 사랑한다는 것

아니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남을 용서한다는 것

아니 나를 용서한다는 것 모두

낙죽한 새 한 마리 하늘로 날려보내고

물이나 한잔 마시는 일이지

숯불에 벌겋게 평생을 달군

날카로운 인두로

아직도 지져야 할 가슴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지져버려야 할 상처가 남아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