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정대<언제나 무엇이 남아 있다>외

미송 2012. 9. 13. 17:13

 

 

언제나 무엇이 남아 있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나는 불을 끄고 누워 삐에르 르베르디의 시집을 읽는다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

 

무엇이 따스함이고 무엇이 차가움인가, 북반구의 겨울을 왜 전지구적인 겨울처럼

말하는가, 우리가 거처하는 이 조그마한 창밖으로도 눈이 내리는가

역시 알 수가 없다

 

*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왜 그럴 수 없다는 것일

까,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가

끔 창문을 열고 세계의 날씨를 관찰한다

 

*

 

내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한줄의 시를 쓸 때 세계의 날씨는 이미 변해 있다, 시는

무력해서 무력 무력 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도 한다

 

*

무장 혁명 봉기가 필요한 날들 속에서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무장 혁명 봉기를 시도해본다

묵시록처럼 불어가는 바람, 구름의 생

오염된 내 생의 대기권을 전복하고 갱신하는 유일한 무기는 고독과 침묵의 시

 

*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천사의 심장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본질적으로 고독을 향해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간 체의 마지막 날들에 대하여 생

각해보는 저녁이다, 그 어떤 따스함과 안락함보다는 신념의 진지 구축이 한 인간의

내면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도 하는 것이다

 

*

체 게바라 만세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려본다, 날짜변경선의 안팎을 넘나들 뿐인, 혁

명 노선의 변경이 불가능한 고질적 영혼의 탄식

 

*

 

결론이 명쾌하게 정해진 여명의 뒷골목에서 나는 취객처럼 고독의 권리장전을 쓴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어딘가로 돌아들 간다

그러고도 남는 게 있다면 태양과 라이터와 담배를 움켜쥐고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필

사적으로 훔쳐내는 사내의 손등이다

 

사내의 손등으로부터 돋아나는 봄에 대하여 지구의 봄으로 귀환하는 자들에 대하여 여

전히 하고픈 말이 남아 있는 자들이 끝내 본질적인 꿈을 꾼다

 

고독한 영혼들의 원동력, 그것은 결론이 명쾌하게 정해진 삶 속에서 그래도 다르게 살

고 싶다는 욕망이다

 

*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하자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

 

욕망이 바람처럼 나를 관통한 그 거리엔 고독만이 텅 빈 한 켤레의 신발로 남았다, 나는

이제 신발을 벗고 또 다른 나의 고독 속에 들어가 눕는다

 

고독의 영유권에 관한 오래되고 끈질긴 나의 요구는 언제나 묵살되었다, 누가 나의 고독

을 점령했는가,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영유권 주장, 나는 이제 신발을 벗고 나의 본질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 단단하게 누울 것이다

 

음악을 끄고 세계를 정리한 다음 나는 처음으로 나와 대면한다, 세상의 각질 같은 별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밤하늘 아래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아픔과 대면한다

 

고통, 죽음, 무중력의 세계, 내가 처음으로 나의 아픔과 대면하듯 나는 고독할 권리가 있다,

나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시선을 차단하고 세상의 저녁을 꺼버리고 이제 나는 비로소 고독의 권리로 자유다

 

*

 

다락방에서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한다

천창을 흐르던 구름의 스틸 사진, 정지 화면 같은 연애 사건, 모든 사랑이 일회적 사건임을

안다

 

반복되지 않는 담배 연기, 지독한 고독의 후유증, 모든 인생도 일회적 사건일 뿐이다

이별은 저녁처럼 빨리 오고 저녁처럼 빨리 당도한 이별은 어둠 속에 무수한 상념의 별을 띄

운다

 

다락방에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그다음은 현실이다, 눈 감고 잠들고 싶은 시간, 나는 다락방에서 인생을

다 찍었다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이 시는 어쩌면 이야기를 하는 한 남자와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

작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검지를 치켜 올린 남자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코트를 걸치고 입에 담배를 문 여자와 다리를 꼬고 앉은 다른 한 남자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다락방이다

  

이야기를 하는 남자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에게 조명은 강조되어 있을 뿐 주변은 어둡다

 그러나 조명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형성한다

조명에 의해 강조된 그 친밀감은 내가 알 수 없는, 내가 들어가 살아본 적 없는, 비밀의 생으로

부터 온다

 

내가 찍고 싶었던,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의 한 장면이다

 

*

 

검지의 대가 혹은 강조된 조명이라는 제목으로 언젠가 나도 한 편의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

히말라야엔 왜 가지? 사람들이 묻는다

글쎄 안 가봤으니까 가겠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히말라야엔 왜 가지?

나의 고독과 더불어 하얀 침묵의 눈 속을 오래 걷고 싶어서 나는 히말라야로 간다

 

*

 

지금도 창문을 열면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체 게바라 만세

체 게바라 만세

 

눈이 내린다

 

시집<삶이라는 직업> 51~62쪽

 

 

 

 

 

짐 자무시 67행성

 

 

각각의 숏들을 연결시키면 영화가 된다

 

그대와 내가 적어나가는 시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의 고독이 끝내 한 생의 얼굴을 이루듯, 사물의 상태

는 끊임없이 유동적이다, 매질(媒質)도 없이, 사물들

은 스스로의 에너지 변화를 통해 자신만의 불꽃을 피

워 올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암전으로 분리된 67개의 행성과

고독의 시가 될, 것이다

 

 

1  

Lasy Bird 에서 술 취한 새들이 노래하는 저녁,

는 탁자의 모퉁이에 당도한 낡은 행성의 저녁 빛을

보네, 창밖은 가끔씩 낙엽들의 암전, 시인, 작가,

러머로 이루어진 밴드가 콘서트를 여는 여기는 핀란

드의 밤,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

 

2 

파리의 어두워지는 저녁이었네, 나는 소르본느 대

학 근처 어느 카페에서 짐 자무시의 인터뷰집을 읽고

있었지, ‘어떻게 보면 이 행성은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죠. 예를 들어 대화라든가,

군가와의 산책, 또는 구름 한 점이 지나가는 방식,

무 이파리에 떨어지는 빛, 또는 누군가와 함께 담배

를 피우는 일‘, 책갈피가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내 내

면의 페이지들의 암전, 여기는 파리의 밤, 누군가와

담배를 피우러 가자

 

3

이면지에 쓴 시처럼 어슴푸레한 저녁이 오고 시인

은 눈을 감고 기타를 치네, 기타를 칠 때마다 별들에

불이 켜지고 그래서 밤은 시인들의 행성, 기타 연주

가 끝나면 다시 암전될 여기는 행성의 내면, ,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러 가자

 

4

내 컴퓨터의 이름은 리스본 724일 거리’, 나는

그 거리로 스며들기 위하여 한 대의 담배를 피우고

세 개의 모음과 네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암호를

치네, 가끔씩 갈매기들이 대서양의 녹색 별들을 물고

날아드는 여기는 리스본의 밤, 그대의 낮은 숨결이

내 귀에 와 닿을 때마다 아아 나는 암전, 대서양 주점

으로 술 마시러 가자

 

5

눈 내리는 밤, 불꽃의 내륙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눈보라의 음악, 문풍지 한 장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적어나가는 방 안의 작은 혁명사, 누군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잠든 함경도의 깊은 밤, 시린 유성이 하

나 휙 빗금을 긋고 지나가면 봉창 문은 이미 착색 판

, 바람이 불 때마다 비사표 성냥갑 같은 마을 전체

가 흔들리는 여기는 바람의 북방 한계선, 시베리아

호랑이들이 더 깊은 숲 속으로 몸을 이끌고 들어가

눈동자의 불을 끄고 잠들면 다시 암전, 여기는 내면

의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얗게 내리는 천사들의 밤

    

6

자무시, 그대는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

라는 이상한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 회원이랬지, 하긴

비밀결사 조직의 이름이 평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 프리메이슨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몇 개의 비밀결사 조직, 가령 시로 암호를 타전하는

요원들,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동지들, 그러니까 가

,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또 다름 점조직, 영혼의 세포

 

7

아프리카, 내 관념 속 마지막 대륙으로 그대는 떠

났다. 나는 여기에 남아 대륙붕의 심장에 관하여 혹

은 북극곰의 새로 돋는 발톱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

각한다. 심장 속 빙산의 일각이 북극곰의 발톱에 긁

힐 때면 나는 남아 있는 자들의 고독과 말없이 돋아

나는 상처의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각한다. 하나의

행성 속에서 그대는 여름을, 나는 끊임없이 겨울을

살고 있다

 

8

시는 무척 추상적이고, 무척 부족적이에요,

시인의 부족 구성원들만이 그 언어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나의 부족에 관하여 생각해본

, 나의 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내가

아는 몇 마리의 구름과 바람 그런 것들이 하나의 부

족을 이루었으니, 오늘 같은 날은 베를린 프로펠러

아일랜드 호텔에 투숙하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프로

펠러를 달고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나의 부족을 만나

고 싶어, 바람과 구름의 부족

       

9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뜨거운

차를 마시고 덥혀진 몸으로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

며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대하여, 덜컹거리는 창문과 덜컹거리며 달려

가는 겨울 야간열차에 대하여, 대륙을 횡단하는 생에

대하여

 

10

사물의 상태, 내가 만지고 쓰다듬는 사물의 상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물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모든 사물들은 뜨겁고 동시에 차갑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

직이며 정렬하는 것이다, 내가 밤에 당도한 것이 아

니라 밤과 내가 지금 여기에 당도한 것이다, 그냥 당

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꾸었기에 지금 여기에

내가 고요한 사물의 상태로 당도해 있다

 

11

담배 연기로 사색을 한다, 담배 연기로 항해를 한다,

참 많은 유령들의 시간이 지났다, 퇴근할 시간이다,

은 것들이 변형되고 더 많은 것들이 추가될 것이다,

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우라를 부정하고 마

후라를 목에 휘감고 펄럭이며 퇴근할 시간이다

 

 

시집<삶이라는 직업> 6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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