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 김기택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 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 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 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우주의 일생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 못해 놓아 준 껌
창비, 2009
몸이 움직일 때 시가 움직인다
나는 시를 쓸 때 무엇을 쓸 것인지 미리 정하지 못한다. 나도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나도 내 몸속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말을 가능한 한 꾸며서 죽이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시에 받아적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싱싱한 그대로 받아적되,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말로 받아적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책상에 앉아서 시를 잘 쓰지 못한다. 흰 종이를 앞에 놓고, 또는 커서가 깜빡이는 빈 모니터를 앞에 놓고 시를 써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내 시는 거의 수첩이나 메모지에서 나온다. 그것은 거리에서 볼펜으로 적은 것들이다. 이 버릇은 내가 20년 간 직장생활을 하며 시 쓸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리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시를 쓰는 것이 가장 편하게 되었다. 내 몸이 움직일 때, 내 시선에 따라 보이는 대상이 함께 움직일 때, 거리에서 일어나는 소음이 나를 툭툭 건드릴 때, 사람들의 움직임과 말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내 몸의 더듬이는 작동한다. 그때가 바로 내 몸이 작은 움직임에도 자극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시간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의식적으로 시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거미처럼 거미줄만 쳐놓는 것이다. 나는 내 거미줄 안으로 들어오는 먹이에게만 관심이 있다. 거미줄 밖으로 지나가는 먹이는 아무리 먹음직스러워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렇게 4년간 길에서 쓴 시들이 모여 다섯 번째 시집 [껌]이 되었다. <김기택>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혁웅<상상동물 이야기> (0) | 2012.09.29 |
---|---|
권혁웅<닫힌 책>外 (0) | 2012.09.28 |
이승훈<이것은 시가 아니다>외 9편 (0) | 2012.09.21 |
정호승<끈>외 5편 (0) | 2012.09.17 |
박정대<언제나 무엇이 남아 있다>외 (0) | 2012.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