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권혁웅<닫힌 책>外

미송 2012. 9. 28. 22:02

 

 

박향률 作 '정오의 명상'

 

 

닫힌 책

-얼굴1

 

그는 앙다문 캄캄함이어서 입속에 혀를 말았다

내력을 봉인하여

줄글로도 귀글로도 풀어내지 않았다

석곡(夕哭)도 곡비(哭婢)도 없었다

질러 놓은 빗장처럼 콧날은 분명했으나

향기는 밖으로만 떠돌았다

두 눈이 닿는 곳에 소실점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을 그의 것이라고도

풍경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은 조금 쭈그러들어 있었으나

먼지들이 결 고운 길을 낸 듯도 하였다

누군가 그를 쓰다듬었다

누군가 그에게 오래 기대었다

 

 

비닐 랩 같은 웃음이

-얼굴2

 

비밀 랩같이 엷은 웃음이 그를 덮고 있었다 팽팽한 웃

음이 입 주변에서 눈가까지 물살이 되어 밀려갔다 자꾸

번져서 그의 입을 지우고 그의 눈을 지우고 이마에 몇 가

닥 실금을 말아 올렸다 가는 눈이 가늠하는 수위를 짐작

할 수 없었다 비닐 랩같이 엷은 웃음이 그를 동쳐 매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구겨진 종이처럼

-얼굴3

 

그가 얼굴을 구겨 가며 울었다 곰곰이 눌러쓰다 지우

다 끝내 손아귀가 움켜쥔 종이처럼 눈 코 입이 모여들었

다 왼쪽 눈이 오른쪽 눈과 만나 그늘이나 누수를 이루기

도 했다 몇 마디 말이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콧등을 넘어

왔다 입도 이도 가지런하지 않아서 그의 말은 휘갈겨 쓴

난문이었다 선물인 그 사람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선물을

꺼낸 뒤에 던져진 포장지처럼 자신이 버려졌다고

 

 

물 위에 뜬 기름이

-얼굴4

 

장마가 모아 놓은 웅덩이 위로 그의 표정이 지나갔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너무 많은 색깔을 숨기고 있었다 불

완전연소의 뒤끝이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할 때마다 울컥

하며 올라오는 게 있었다 철벅이며 그를 따라갔을 때, 휴

면계좌처럼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소리였다

 

 

“시인의 몸은 세상의 여러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기(受容器)이거나 공명통이다.” 그러니 원초적 감각들에 도달하기 위해 몸을 사용하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열(身熱)이 내 몸의 고도에/ 등고선 한 줄을 더 적어 넣을 때” 또는 “열기가/ 서둘러 얼굴에 후끈할 때” 몸을 통과하는 그 감각을 포착하는 것이 이 시집의 관건이다. <서동욱>

 

시집<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200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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