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마화
―The Waste Land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봄비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走路를 일깨우고 모래바람과 욕망을 뒤섞고 더 많은 마권을 꽃잎처럼 흩날리게 한다 겨울은 오히려 따스했다, 눈이 대지를 덮는 동안 나는 몇 편의 시를 썼고 소소한 액수로 밀레니엄 복권을 샀으며 어느 날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박이 터지는 바람에 잠시 대박 터지는 꿈은 망각될 수 있었다 눈 쌓인 불량 주로 위에서 국산 영화는 유래 없는 속도로 선행을 때려 고액 배당을 선사했고 도주 후 필사의 버티기 작전을 폈던 몇몇 시인들은 과도한 부담중량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직선 주로에서 끝내 호미질을 하기 시작했다 과천벌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여름이 급습해왔다 우리는 경마공원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예시장 앉아 커피를 마셨지요 불량 주로에선 폭탄배당이 속출한답니다 흙탕물 튀는 판에선 자주 똥말들이 기승을 부리니까요 경마뿐 아니라 인간 사회도 결국 혈통의 게임이라 생각해요 그러나 한평생 나쁜 피의 말을 부리며 시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20세기 마지막 그랑프리 대회에선 사상 최초로 국산마 〈새강자〉가 외국산마 〈울프 사일런서〉〈스트라이크 테러〉 등을 꺾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지요. 이 땅의 경마인의 한 사람으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킥킥, 저는 사실 한국産이 아닙니다 출생은 제주도이지만, 제 부마 피어슬리의 정액은 미국에서 공수돼 왔거든요 변마 아닌 수입산마 있나요? 박종팔은 태국 랭킹 1위 통탁 키야트파이팍을 3회 KO로 누르고 한국 복싱의 우수성을 과시한 바 있지요 경주로에 나오면 가슴이 트이는 걸 느낍니다. 돈을 걸지 않으면 경마가 성립하지 않듯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시가 재미없었을 거예요 주말엔 주로 경마 예상지 〈명승부〉를 보고, 월요일엔 마음의 남쪽에 앉아 금강경을 읽지요 그대는 반인반마의 고독을 아는가 사내는 말들이 잊혀질 때까지 해풍에 머리를 헹군다* 바람 속, 한줌의 모래가 배당의 흐름을 알려주리라 언제나 스산한 바람은 추억을 향해 불지요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나쁜 피의 말을 탄 죄로 나 혼자 안개 속에 갇혀 있어요 결막염을 앓는 한 시인을 경마장에서 만났지 그의 눈에 비친 나 역시 血眼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텅 빈 까치집 아래 나무 그늘에 앉아 집을 날리고 울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도시, 애마橋 위로 한 떼의 거세마들이 흘러갔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욕망이 파멸시켰으리라 나는 생각지 못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원형 트랙, 내 마음의 변마는 변마답게 진짜 斜行을 하고 싶어요 나는 가끔, 무한의 우주 공간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보이저 1호를 생각한답니다 〈서두르세요, 창구를 닫을 시간입니다〉 마지막 경주, 불모지(33전 0/3)란 말을 놓고 한 구멍 박아버려요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박 터진 당신, 義齒값은 만들어야잖아요. 왜 이리 밀어, 이 씨발년이, 일단 찍어, 찍어, 찍으라잖아, 원래 막판은 이래요, 모두들 뚜껑이 열려있거든요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함민복의 시 「해변의 경마」에서 인용.
꽃이라 불렀는데, 똥이 될 때
이 곰은 성질이 사나워서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불곰이 갇힌 철창 으시시한 푯말 앞에서
저 곰 바보 같애
실없이 웃고 있는 구경꾼들
무엇이 성질이 불 같은 정글의 왕자를
실없는 바보로 만드는가
갇혀 있기에 길들여진 것은
엉덩이에 까맣게 똥이 눌러붙은
저 꽃사슴 떼처럼
추하다
이 시는 아름답습니다
꽃향기가 납니다
나도 푯말만 내걸은 적은 없는가
동물원 꽃사슴 같은 시만
푯말 걸고 노니는 시대에
갇힌 철창 속에서도
똥을 꽃으로 만개시키는 이들이 무섭다.
생(生)
천장(天葬)이 끝나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 떼
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
쓰러진 육신의 집을 버리고
휘발하는 영혼아
또 어디로 깃들일 것인가
삶은 마약과 같아서
끊을 길이 없구나
하늘의 구멍인 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
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
알을 낳으리
시집<천일마화 >(2001) 中
유하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데뷔 제1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무림일기} 세계사 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한다} 문지 1991,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열림원 1999, {천일마화} 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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