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韓愈
한유(768~824)는 자가 퇴지退之, 하남 하양河陽 사람이다. 원적이 하북 창려이고, 관직으로는 이부시랑을 지낸 적이 있고, 사후에는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그를 가리키는 호칭도 한퇴지, 한창려, 한이부, 한문공 등 실로 다양하다.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형수가 거두어 키웠는데, 형수도 생활이 어려워 성장기에는 고난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같은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송나라 때 소식은 한유의 업적을 평가하면서 “한유의 문장은 수백 년 동안 빈사상태에 빠졌던 고문을 기사회생시켰다”고 했다. 그만큼 한유는 지나치게 형식미를 추구하던 변문의 기풍을 일소하고 소박하고 꾸밈없는 고문을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여기서는 한유 대표작 중 하나인 <잡설4>를 소개한다.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어야 천리마도 인정을 받는다. 천리마는 항상 있을 수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명마가 있어도 노예들 손에 끌려 다니며 치욕만 당하다가(다른 평범한 말들과) 함께 마구간에서 죽어갈 뿐,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능력을 지닌 말은 한 번 먹었다 하면 곡식 한 섬을 다 먹기도 한다. 그런데 말을 먹이는 사람은 이 말이 천 리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먹인다. 이 말이 비록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배불리 먹지 못하면 힘이 모자라서 그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보통 말처럼 살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천 리를 달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말을 다루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먹이는 것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말이 아무리 울어도 그 뜻을 모르고, 채찍 들고 말에게 다가가 “세상에 왜 이리 쓸 만한 말이 없나! ”라고 한다. 허허! 정말 말이 없는 걸까?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옛날 춘추시대 말 관상의 전설적 달인이라는 백락과 천리마 이야기를 통해, 소회를 피력하고 세태를 풍자했다.
문학과 관련된 한유의 주장을 대략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문이명도文以明道’ 즉 “글이란 전통적 인의와 도덕을 선양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정치와 사회의 불합리를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이상을 글을 통해 과감하게 표현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둘째, ‘불평즉명不平則鳴’ 즉 “세상 모든 것은 평온을 잃으면 소리를 내게 된다”는 것으로,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은 뭔가 안에 쌓이고 쌓여서 어쩔 수 없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또한 전통적인 ‘발분저서發憤著書’ 설을 계승한 것이다. ‘문이명도’가 고문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불평즉명’은 고문의 문학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학고창신學古創新’ 즉 “옛것을 배우고 새것을 창조하고자” 했다. 변문을 반대하고 선진과 서한의 고문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옛것을 배우되 옛것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넷째, 내용이 충실한 작품을 쓰려면 작가의 학문과 수양을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한유의 산문은 사마천의 뒤를 이어 문체, 기법, 언어, 풍격 등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pp196~197
청대에는 공안파와 같은 문학적 유파가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김성탄(金聖嘆, ?~1661), 이어(李漁,1611~1685), 장조張潮, 정섭鄭燮, 원매(袁枚, 1761~1797)등의 문인들이 소품의 정신을 이어갔다.
김성탄의 <불역쾌재(不亦快哉, 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는 33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 때문에 열흘동안 한 친구와 절에 갇혀 있었을 때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꼽아보았던 것을 글로 쓴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들어본다.
2칙: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갑자기 해질녘에 찾아온다.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해서, 배를 타고 왔느냐 육로로 왔느냐 묻지 않고, 우선 거실로 가서 조심스럽게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동파의 마누라처럼 술을 잔뜩 사다 주지 않겠소?” 그러면 아내는 선뜻 금비녀를 뽑아, “이것을 팔지요”라고 말한다. 우선 사흘 동안은 넉넉히 마실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선다. 아아, 이것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9칙: 식사 후의 무료한 때에, 헌 가방을 열고 그 안을 이리저리 뒤적인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돈을 꾸어간 사람들의 수십, 수백 장의 차용 증서가 나타난다. 꾸어간 사람 중에는 고인이 된 이도 있고,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빚을 갚아줄 가망은 없다.
나는 슬그머니 그것을 다발로 묶어 불을 지피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아, 이것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1칙: 아침에 눈을 뜨자 간밤에 어디서 누가 죽었다고 집안사람들이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눈치다. 나는 대뜸 누가 죽었느냐고 집안사람에게 묻는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마을에서 가장 구두쇠로 소문난 영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아, 이것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7칙: 여름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란 수박을 올려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문구가 반복되는 이 글은 마치 피천득의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10년 만에 지기가 찾아왔을 때 아내는 흔쾌히 금비녀를 뽑아 술을 산다. 역시 그 남편에 그 아내다. 되돌려 받을 길 없는 차용증을 조용히 태워버리면서 그 연기가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털웃음을 짓거나, 동네 제일가는 수전노가 죽었다는 소식에 키득댄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새빨간 소반에 담긴 새파란 수박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면, 그 숨막히던 더위가 훌쩍 사라지는 듯하지 않던가.
한 조목 한 조목 읽어내려 갈 때마다 그가 꼽은 절묘한 순간의 포착에 무릎을 치며 “그렇지!”를 연발하게 된다. 그는 호탕하고 자유분방하며 여유롭고, 유머러스하며, 풍류를 아는 멋진 남자였다. 무게 잡으며 점잖은 척하는 사대부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일탈성, 의외성, 진정성의 표현, 이것이 소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pp223~225
청언소품淸言小品
명말 청초에는 수백 종의 청언 소품집이 쏟아졌다. 타락한 정치에 좌절과 환멸을 느낀 이 시대 문인들은 관료로서의 삶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제도권으로의 진입을 거부한 채 의도적으로 아예 벼슬길에 발을 들이지않고 자유롭게 은거하는 삶을 택했다.
<중략>
평범하게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사물과 사건 속에서 끌어올린 생활 속의 깨달음과 단상을 모아 엮은 것이 ‘청언’이다. 따라서 대부분이 처세철학이나 생활의 지혜, 심미적인 정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짧은 글 속에 담긴 깊은 정취와 지혜는 당시 혼란한 사회를 살던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휴식이자 청량제였다.
이러한 청언소품은 ‘고문古文’의 완전한 파격이다. 기승전결의 구성은 고사하고 한 편의 글이 갖는 최소한의 요건이라 할 수 있는 편폭 자체가 없이 단편적인 하나의 문장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수사학적 기교 없이 단순한 반복적인 나열로만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직관적이고 정서적이며 깊은 의미와 정취는 긴 여운을 남긴다. 당시 애독되었던 진계유(陣繼儒, 1558~1639)의 <암서유사巖棲幽事>,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采根譚> 장조張潮의 <유몽영幽夢影>을 한 구절씩 인용해본다.
향은 사람을 그윽하게 해주고, 술은 사람을 호방하게 해주고, 바위는 사람을 준수하게 해주고, 거문고는 사람을 침묵하게 해주고, 차는 사람을 상쾌하게 해주고, 대나무는 사람을 냉철하게 해주며, 달은 사람을 고고하게 해주고, 바둑은 사람을 한가롭게 해주고, 지팡이는 사람을 가볍게 해주고, 물은 사람을 미울 줄 알게 해주고, 눈은 사람을 광달하게 해주고, 검은 사람을 비장하게 해준다. 부들방석은 사람을 야위게 하고, 미녀는 사람을 애달프게 하며, 스님은 사람을 담박하게 하고, 꽃은 사람을 운치 있게 하고, 골동은 사람을 고풍스럽게 한다.
진계유, <암서유사>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오매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는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매 기러기가 가고 나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는 일이 생겨야 비로소 마음에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지게 된다.
홍자성, <채근담*>
*채근담이라는 제목은 송대 왕신민(汪信民)의 <소학(小學)>중 “채소 뿌리를 씹을 수 있으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문구에서 왔다.
풀뿌리를 씹으며 그 담담함 속에서 참된 맛을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능히 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꽃을 심어 나비를 맞이할 수 있고, 돌을 포개어 구름을 맞이할 수 있으며, 솔을 심어 바람을 불러들일 수가 있고,
물을 담아 부평초를 띄울 수가 있다. 누대를 쌓아 달빛을 불러들일 수가 있고, 파초를 심어 비를 맞이할 수가 있으며,
버들을 심어 매미를 불러들일 수 있다.
장조, <유몽영>
심오한 인생의 의미를 포착하고 끌어내는 ‘청언’은 밖으로만 향한 나의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주었다.
pp226~228
<중국문학의 즐거움>(고려대 중국학연구소 2009, 차이나 하우스)
타이핑 -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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