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을 놓치다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2
함께 젖다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수건이 많이 젖었습니다
그새
3
환생
진작에 자목련쯤으로 오시거나
기다렸다 백일홍이나 수국이 되어 오셨으면
금세 당신을 가려냈으련만,
하필 풀꽃으로 오셨어요, 그래.
새벽같이 만나리라 잠도 못 이루고요,
눈 뜨자 풀숲으로 내달았는데요
그렇게 이른 시간에 우리 말고
누가 있으랴 싶었는데요, 웬걸!
목을 빼고 손짓하시겠거니, 짐짓 슬렁슬렁
풀밭을 헤짚는데요, 아, 이런......
온 산의 풀이란 풀들이 죄다 고개를 쳐들고
사람 찾는 낯이 되지 뭐예요
이를테면, 금낭화, 맥문동, 애기똥풀......
이름이나 일러 주시지요
알고 간대도 이름과 얼굴이 따로 놀아서
오늘처럼 허탕만치고 오겠지요만
4
손목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쓰게 되었으니
묻어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5
걸레스님
청소 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담임선생도
아무 말을 못 했다.
6
행선(行禪)
신문지 두 장만 한 좌판에
약초나 산나물을 죽 늘어놓고는,
노인은 종일 산이나 본다
하늘이나 본다
손바닥으로 물건 한번 쓸어보지 않고
딱한 눈으로 행인을 붙잡지도 않는다
러닝셔츠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채질이나 할 뿐.
그렇다고 아무 말도 없는 것은그렇다고 아무 말도 없는 것은 아니다
발치에다 이렇게 써놓았다
“물건을 볼 줄 알거든,
사 가시오.”
나도 그런 물건을 팔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장사를 그렇게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7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0시 5분에 들어왔어요.
요즘 들어 야릇한 몸내를 풍기는 게 수상쩍었지만,
언감생심! 구실도 못하는 병든 늙은이 곁으로
꼬박꼬박 돌아와 누워주는 것만도 고마웠지요.
가면 또 어딜 가겠어요. 수천 수만 구멍 속의 새끼들을 두고,
별의 수만큼은 되는 식구들의 허기를 두고.
새벽같이 붕붕대는 방조제 공사 트럭 소리에
선잠이 들다 깼는데 안 보입디다,
첫 배 따라서 일 나갔겠거니 했지요.
상보 덮어 아침상까지 봐놓고 간걸요.
12시 좀 지나서 점심상 보러 오겠다고,
저녁나절 한 번 더 다녀와야 한다고 편지까지 적어놓고요.
아직은 길 막지 말아요.
오늘은 아주 먼 데까지 갔다 오는가 봐요. 지금 몇 시지요?
서해(西海) 네 이년!
8
폭설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 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바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거다.
9
터미널 키스
터미널 근처 병원 장례식장 마당 끝
조등 아래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죽음과 관계 깊은 일,
방해될까 봐 빙 둘러 지하철을 타러 갔다.
휘적휘적 걸어서 육교를 건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입맞춤은 끝났을까,
돌아가 내려다 보니
한 사람만 무슨 신호등처럼 서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라는지 가라는지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10
소쩍새
"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누군가 울땐 가만히 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윤제림| 충북 제천 출생.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삼천리호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그는 걸어서 온다》 등이 있음. ‘21세기 전망’ 동인.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학 교수.
20131103-202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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