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손을 내밀어 보라
다친 새를 초대하듯이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는
자신에게
상처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언 꽃나무를 초대하듯이
숨죽이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기쁨에게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선운사 동백
당신과 나
그 사이에 아무도 없던 적이 있었다
오직 붉은 동백만이
모든 꽃은 다음에 피는 꽃에
지는 법
지금은
심장처럼 바닥에 떨어진
붉은 동백만이
당신과 나
그 사이에
나는 투표했다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 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두 심장 중에서 부서진 적 있는 심장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내 가슴이 색을 잃었을 때
물감 빌려주는 엉겅퀴에게 나는 투표했다
새벽을 훔쳐 멀리 달아났던 스무 살에게,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게 투표했다
행복과 고통이 양쪽 면에 새겨져 있지만
고통 쪽은 다 닳아 버린 동전에게 투표했다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에게 투표했다.
한 사람의 진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흉터의 문장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불의 가시
신이 가시덤불에서 말을 걸든 꽃 속에서 말을 걸든 결국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프란츠 폰 살레스
아는 사람이 날마다
백팔배를 한다는 아픈 사연을 듣고 나서
마룻바닥에 담요 접어 깔고
피라칸사스 가시나무 서 있는
동쪽 창 향해 아침마다
백팔배를 시작했다
마루 무늬 위에 어른거리는 나뭇가지
그림자 세며 엎드려 절을 하다가
열흘쯤 지나서야
나무 그림자 속에 숨은 새둥지와
부리 벌리고 지저귀는
새끼 새들을 발견했다
그동안 부화 중인 새알들을 향해 기도하듯
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틴어로 불의 가시라는 뜻의
피라칸사스
어미 지빠귀 새는 어떻게
불의 가시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
둥지 지었을까
가시는 자신을 찌르기도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기 때문일까
솜털 부숭부숭한 새끼 새처럼
그 안에서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는 듯
날마다 가시나무 껴안고
삶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는
길 발견하는 것이
백팔배의 의미라는 듯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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