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인숙 <우연> 中

미송 2013. 11. 15. 07:37

 

 

 

작가의 말

 

 

오래전의 일이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잠시 전에 그는 길 건너편에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건널목을 건너 내 뒤를 쫓아온 그는 쓰러질 듯이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는, 놀란 내 얼굴 앞에서 가쁜 숨결로 말한다.

 

우리 서로 아는 사이죠?

 

그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이름을 말하고, 나로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5학년 몇 반의 담임 선생님 이름까지 말한다. 그리고 그때 내가 입었던 분홍색 재킷과 원피스도. 그러나 그뿐이다. 이를 다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 아주 매력적이었던 그는, 그런 몇 가지의 기억들만 말하고는 다시 자전거를 바로 세운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어요? 길 건너에서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너무 안 변해서요. 그래서 나까지 옛날인 줄 알았어요.

그날, 그는 차를 한잔 마시자는 얘기도 안 하고. 내 전화번호를 묻지도 않았다. 내게 이르러 말을 건네는 순간 이미, 그는 나를 쫓아와야 했던 이유를 잊어버린 듯했고, 난감하고 어색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내게 자전거를 타는 남자는 항시 그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누군가 달려와 내게 말을 건네는..... '우린 서로 아는 사이죠'라고 묻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추억이고, 자기 안의 결핍이고, 혹은 상처거나, 홀로 꿈꾸었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내 안에 있었고, 또한 그의 안에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든 기쁨이든, 혹은 모욕이든 찬사든, 그와 내가 치러야 할 생의 순간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내 앞에 있다. 그러나 그 느닷없는 순간을 위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항상 낯설지만, 실은 가장 익숙한 것에서부터 온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한겨울 내내 썼던 글을 끝내고 노트북을 덮었더니, 창밖은 봄이었다. 겨울잠을 자다가 때를 놓쳐 너무 늦게 일어난 겨울 짐승처럼, 봄 햇살이 기막혔다. 그러나 내친김이라고, 차를 몰고 남쪽의 벚꽃을 보러 갔었는데 저녁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며 내가 떠올린 것은 눈이었다. 지난겨울에 눈을 봤던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겨울에 쓴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눈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었다. 작품 속에 눈이 내리던 날,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가. 수없이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듯하더니, 전구가 끊어지듯 머릿속이 텅 비었다. 어쩌면 나는, 다만 '눈이 내렸다'라고 그렇게 써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내 책을 읽는 누군가는 눈 대신 벚꽃을 보기도 하련만.

 

모든 사소한 것은 특별하고, 또한 모든 특별한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삶을 두렵게 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가급적이면 나는 모든 사소함으로부터 위로받기를 바란다. 어떤 특별함이 아니라, 극히 사소한 것들..... 그러나 사소하다는 것은 뭘까. 사랑은 사소한 일이 아닌가? 섹스는 그렇지 않은가. 혹은 죽음까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공원을 산책하고, 가끔씩 맛있는 집을 찾아가 외식을 하고, 편안한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고 그러는 일들이나,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의 저녁에 창밖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일들은 어떨까. 이런 질문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사랑이 정직하게 사랑이기만 하고, 섹스는 정직하게 섹스일 뿐이고, 노트북 옆에 놓인 식은 커피잔은 그냥 정직하게 커피잔이기만 하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실은 특별하거나 사소한 것 대신에, 삶에는 그런 관계들과 풍경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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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머릿속 기억으로는 칠년 전 일이 아닐까 싶다. 독수리타법을 탈피하려고 타자연습을 했을 때 주로 소설이나 소설가들의 서문을 쳤던 것 같다. 시 보다는 산문을 더 많이 타이핑했다. 시는 소리내며 쓰고 소설은 그냥 썼다. 지금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그때의 기록을 곁눈질로 읽곤 한다. 바쁜 아침시간대에 새삼 덧칠도 하며 오후쯤 한번 더 음미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