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은희경<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中

미송 2013. 11. 8. 08:00

사랑오해와 착각의 부실공사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면 한갓 우연의 소산일까.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남들과는 다른 독보적이며 예외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따져 보면 사랑처럼 진부하고 흔한 스토리도 달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사랑에 빠지고 때로 사랑 때문에 죽음조차 불사한다. 은희경(1959~)의 단편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은 사랑을 낭만화하고 절대시하려는 태도에 딴죽을 건다. 이 반어적 제목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은 자신들이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라는 착각 속에 관계를 이어가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와 편견으로 지탱된 관계였으며, 결국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오해 때문에 파국을 맞는다. 다소 과장되고 도식적인 느낌이 없지 않은 대로 이 맹랑한 작품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사랑의 전 생애에 개입하는 오해의 연쇄를 통렬하게 까발림으로써 사랑의 탈낭만화·탈신화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남자가 처음부터 여자를 곱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의 거침없는 성격에 약간 거부감을 느꼈다. ()구석에 말없이 앉아만 있는 남자를 여자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으로만 보았다.”

 

인용한 대목에서 보듯 두 주인공의 만남은 첫눈에 반했다식의 낭만적인 사랑의 점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결국 연인으로 맺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사랑의 특별함과 위대함에 대한 반증이라고 당사자들은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들이 맺어지게 된 계기가 순전히 오해의 산물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기초에서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실공사였음을 고발(?)한다.

 

주인공 남녀와 여자의 직장 동료인 미스 박이 함께한 술자리가 끝난 뒤 세 사람이 같은 택시에 탄다. 미스 박은 가까운 곳에 사는 남자가 자신과 함께 택시에서 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뜻밖에도 남자는 옷깃을 잡아끄는 미스 박의 손길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것을, 남자가 미스 박이 아닌 자신을 택한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행복에 잠긴다. 사실인즉 남자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내릴 곳을 지나친 뒤에야 눈을 뜨게 되었던 것. 게다가 오해에서 비롯된 행복의 표정을 담고 있는 여자의 얼굴과 잠이 덜 깬 남자의 몽롱한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 아주 특별하고도 위대한 일이 시작되어 버렸음을 확신하게된다.

 

두 사람의 사랑에 불을 댕기고 그 불길을 지속시킨 오해의 목록을 들자면 지면이 모자랄 터이다. 그보다는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또한 얼마나 어이없게 종말을 맞이하는지를 살펴보자. 직장 업무에 지친 남자는 심신이 피로했음에도 스스로에게 사랑의 엄연한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서여자와 만날 약속을 한다. 그러나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여자를 향해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실을 만한 다정한 말로 던진 질문이 균열의 계기가 된다: “피곤해 보이는데, 어디 아파?” 그 말은 여자로 하여금 남자보다 세 살 많은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자기에 대한 감정의 강렬함이 시들었다는 뜻으로받아들이게 한다.

 

여자의 반응이 부드러울 리 없고, 이렇게 시작된 오해는 복제와 확대를 거듭한 끝에 남자와 여자 모두 상대방이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은희경은 두 연인의 심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비커에 담아 분석함으로써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 결별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냉혹하게 서술한다.

 

 

최재봉 기자 / 한겨레신문 200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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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인들은 사랑이라는 최면과 자기암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실험해보며 그러는 가운데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게 된다. 몇몇 그 방면에 뛰어난 사람들은 마치 전문의가 일회용품이자 소모품인 처녀의 피막을 바느질로 재생해내듯 자신의 지나간 모든 사랑을 봉합함으로써 감정의 순결을 새것처럼 수선하여 바치는 기교까지 익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에 빠졌어'라는 자기 암시와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최면에다가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첫사랑이야' 하는 망상의 세 가지 구색이 다 갖춰지는 셈이다. 허나 다행히 우리의 주인공은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다. 게다가 여자의 나이는 서른둘이고 남자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앞서 말한 기교를 몇 차례 써먹어봤을 것이고 단순히 '사랑에 빠진 감정'을 느끼기 위해 새로 최면과 암시를 시도한다는 게 얼마나 귀찮고도 소모적일 뿐인가를 알 만한 나이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늦은 나이에 별다른 노력 없이 저절로 불붙은 열정에 대해 신기해하고, 결국 그 절대성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위대한 연인은 헤어졌다. 왜 헤어졌냐고? 그야 그들의 사랑에서 더이상 위대함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들이 피곤을 무릅쓰고 만날 약속을 한 것은 스스로에게 사랑의 엄연한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의 눈물을 한번 면밀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삶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보려는 의지나 혹은 시간이 충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파일에서 그들이 만나는 장면을 '불러오기' 한 뒤 '되살리기' 화면을 보고 싶어하리라 생각한다. 파일이름, 러버. 덧붙이는 말,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암호는? 말없음표.

 

차이라는 것은 에너지의 발생이라고 했지만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고는 해도 남자는 바로 여자의 다감함이 실은 심한 감정기복이었고 발랄함의 정체가 사실은 경솔함이었다고, 그 차이의 이면을 보고 있다.

 

다르다는 것이 강한 호감이 되지만 상대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긴장을 잃은 다음부터는 바로 그 다르다는 것 때문에 피곤을 느끼지. 그동안 저 유치함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스스로의 참을성이 기특할 정도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절대성이란 사실상 절대적인 동질성에 대한 소망이라는 거야.

 

남자는 이제 위대한 연인에서 유치한 여자로 전락한 여자와의 수준차를 일부러 강조하기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계속 유식한 티를 내며 에피그램을 찾아낸다. 그것을 여자와 헤어질 정당한 이유로 삼으려는 사람처럼 어찌 보면 필사적이다.

 

자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결론이 그렇게 났으므로 이제는 발설을 하느냐 하는 절차의 문제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 쪽으로 선뜻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상대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이다. 마치 종합병원에서 약을 타기 위해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짜증을 감춘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파묻힌 채 말없이 상대의 작별의 경고등에 램프가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보면 '타의에 의해 헤어진다'는 아리송한 말도 생길 법한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각기 상대를 원망한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데에 너무 뜸을 들이는 건 아닌가.

 

남자라고 여자를 그냥 보내고 싶었겠는가. 가슴속에 고수동굴보다 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순간 그곳을 빠져나가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바람소리를 느끼면서도 사라져가는 자기의 위대한 연인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물론 여자에게는 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관비만은 남자가 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그가 지켜온 나름의 남자다움이요 보수성이었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도 뇌리에서 떠나가주지 않는 그 보수성과 그것을 떠나가지 못하도록 했음에 틀림없는 자기의 소심함이 끔찍하게 싫어서, 단지 그것 때문에 그는 택시 정류장의 쇠기둥에 살짝살짝 머리를 짓찧으며 또 한번 울었다.

 

남자의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이제 쓸쓸한 정도의 풍랑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연한 속살을 난폭하게 문질러대는 거센 모래바람이다.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자 뒷유리창 너머 여자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 모습을 이집트 벽화의 제사장처럼 한껏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실수가 튀어나온다. 늦은 밤 거리에서 작아지고 있는 그대, 금방이라도 굴러가버릴 마른 나뭇잎처럼 그대, 이 불안과 닫힌 체념 그것이 혹 사랑은 아니었는지. 길이 꺽어지며 이윽고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자의 시는 탄식이 된다. , 기어코 굴러가버리는구나, 가벼운 그대여.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여자 쪽이 훨씬 빨랐다. 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랑이 진정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시험대에 올라가지 않았을 때까지뿐이야. 시험대에서 분석하면 모든 사랑은 다 가짜로 밝혀지니까.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것은 우연히 그 시험을 만났기 때문이야. 아침밥을 먹으면서 여자는 침울한 목소리를 감추며 당장이라도 선을 보겠다고 말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

 

본시 남자는 본질에 있어 여자보다 훨씬 감상적이다. 그리고 여자 문제에 관해 소모적인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여자보다 지적이긴 하다. 어쨌든 이로써 남자는 자기 삶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화려한 비탄을 갖추게 되었다. 다른 남자들처럼 그도 한 사람의 가장이 된 뒤 첫눈 오는 날이나 어느 낯선 바닷가에서 "사실 내게는 마누라말고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그 여자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자의 분석과 남자의 감상. 누구 쪽이 더 운이 좋으며 또 누구쪽의 생각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그것은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려니와 알 필요도 없다. 당신은 그것을 안다고 해서 자기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상상 1996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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