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나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1992, 등단작
슴베라는 말을 배우다
슴베라는 말,
슴베찌르개를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말,
사전을 찾으려다 금세 잊어버리는 말,
큰맘 먹고 사전을 뒤지면
칼,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이라 나오는 말,
찬란하게 드러난 칼몸이 아니라
자루 속에 숨어
칼끝의 궤적을 제어하는 뭉툭한 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
그 뒤엉킨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말,
감싸 쥔 신의 손아귀를 얼핏 느끼게 하는 말,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세계라는 걸 일러주는 말,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세계가
화려하고도 정교한
칼몸을 춤추게 한다는 걸 가르치는 말,
거칠고 투박한
여기가 오히려 숨은 힘이라고
눈에 빤한 이 세계와
숨은 차원을 일순간에 바꿔치기 하는 말,
주눅 들지 말고
이제 지상에서 살아가라고
슴베찌르개처럼 가슴에 거칠게 박히는 말.
계간 『시와 경계』 2009, 여름호
얼핏 본다는 것
얼핏 강아지인가
했더니
욕실 앞에 뭉쳐진 수건이었다
얼핏 수건인가 했더니
느릿느릿 일어나는 강아지였다
이럴 때마다 흠칫 놀라는 건
얼핏 본 것이
진짜 모습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마다 형상이란 건
무엇과 무엇 사이의 진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깨달음이 아니길 바란다
사물이란 것은
수건과 강아지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얼핏 볼 때만 제 모습을 들키면서
보고 싶은 대로 꼴을 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려 애쓴다
사물의 둔갑술
얼핏 본다는 위대한 관법
이런 말도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가장 견고한 생각만 하기로
하는데, 머리를 감을 때
얼핏 누군가 욕실 문 앞에 서 있어
눈을 닦고 보니
외발로 서 있는 선풍기였다
다시 머리 감다가
얼핏 선풍기이려니 했더니
코앞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막내였다.
『시와표현』201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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