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이화 <모란와인>

미송 2013. 12. 1. 20:15

     

     

     

    모란와인 / 박이화


     

    취해도 아름다운 건
    술이 아니라 꽃이다
    길고 우아한 꽃대에
    한 잔의 와인처럼 찰랑이는 모란


    아직 반이 채워졌다고 해야 하나
    이미 반이 비워졌다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이 잔에서 저 잔으로 붉은 나비의 입술 옮겨 간다

     

    목이 길어 슬픈 짐승처럼
    저 미끈한 녹각 위에 피보다 선명한 한 잔의 와인
    그 모란 한잔 쏟아진 자리에
    핏빛 흥건한 꽃잎 엎질러져 있다
    그렇게 피는 물보다 진하고
    그 피보다 진한 게 또 사랑이어서
    일배일배부일배*


    취해서 아름다운 건 술이고
    취해도 아름다운 건 꽃이다
    바람 앞에서
    또다시 잔과 잔이 부딪히며
    이윽고 봄날은 빈 술병처럼 깊어간다.

     

     

    * 李白의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이란 시에서 나오는 구절.

      뜻인 즉,  산중山中에서 유인(幽人: 山中에 은거하는 이 )과 그윽한 술잔을 함께 나눈다는 내용.

    둘이서 마시노라니 兩人對酌山花開
    산에는 꽃이 피어오르고

    한 잔 한 잔 기울이다 보니 一杯一杯復一杯
    끝없는 한 잔

    나,이제 취했으니 그만 자려네 我醉欲眠卿且去
    자넨 갔다가

    내일 아침 마음 내키면 明朝有意抱琴來
    거문고 안고 오게나그려

     

     

    박이화 시인
    경북 의성에서 출생. 대구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경운대학교 사회체육학과 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연어』(애지, 200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