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준철 <마흔, 만나다>

미송 2013. 11. 28. 07:38

 

 

 

마흔, 만나다 / 김준철

마침내, 마주 서게 되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았으나

그 모든 익숙한 것들이

어색해지는 시간이다

그 아침의 햇살은 더욱 날카롭게 깃털을 세우고

바람은 몸 안에 집을 짓고 시리도록 슬픈 노래를 부른다

빛나는 시간도,혼란의 시간도,크고 작은 소꿉놀이의 시간도 지난 지 오래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낯선 그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

눈두덩이 사이로 뻐근하게 느껴지는 무게

이렇게 살아왔구나 이렇게 버텨 왔구나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고

아쉬운 것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여느 때와 같이 한쪽으로 기우는 두통을 부축하고

급히 다시 길을 연다

마주 섰던 너를 등지고……

 

 

멀리 있을 오래전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잊은 지 오래다. 내 안에 시퍼렇게 날을 세운 그 무엇이 있을까? 아직 남아 있을까?낯선 땅에 휘청일 때마다 시간은 뭉텅뭉텅 지나갔던 것 같다. 맥없이 사라져가는 시간들 사이에 뜨거웠고 간절했고 선명했던 기억들이, 바람들이, 꿈들이 함께 사라져 간 것 같다. 어느 순간, 멀리 두고 온 이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애써 기억하려 해도 그 이름이, 그 장소가, 그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 먹먹하기만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두려워지는 때가 된 것 같다. 아직은 한참 더, 조금은 더 철없이 달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이젠 내 안에 그 무엇도 생각을 따라가질 못한다. 시 한 편을 끝까지 만들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고 급기야 며칠씩…… 몇 달씩…… 글 한 자 쓰지 않고 지내기 일쑤가 되어 버렸다.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을 가지지 못하고 이루지 못할 것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것을 억울해하거나 한탄할 여력도 없다. 짧은 한숨에 녹여 버리고 급히 통풍으로 쑤셔오는 발목을 걱정하게 되었다. 오래전 난 아들이었고 난 시인이 되었고 남편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오랜 시간, 아들 같지 않은 아들, 시인 같지 않은 시인, 남편 같지 않은 남편,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문득, 햇살 좋은 어느 날 생각했다.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앳된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때론 한없이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때론 술에 취해 울먹이는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때론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막 생각난 글귀를 적어대기도 하고, 때론 혼자 바닷가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는, 아주 오래전, 내가 두고 온 나의 모습이었다. 너무도 눈부신 나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닌, 그냥 그 시간 그 모습만이 가지는 환한 빛이었다. 참으로 눈부셨던 시간의 나였다. 그 무엇을 해도, 혹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있어도 그 존재만으로 눈부셔 보였다. 그 어떤 긴장도, 열정도, 의지도 없이 모든 무장을 해제한 듯, 흐물거리고 흐느적거리며 비틀거리기까지 하는 마흔 중반의 그 무엇도 아닌 내가 아니라, 시인은 당당히 가난할 자격이 있는 거라며 건배를 청하던 이십 대 초반의 내가 떠오른 것이다.

그 무엇을 해도 시간은 내내 그 자리에 있었고, 3차 4차까지 술을 마셔도 태양은 머리 위에서 내려가질 않았던 그때…… 수없이 많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고, 또 그 이룰 수 없는 꿈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절망을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어김없이 또 다른 수없이 많은 꿈을 다시 꾸었다. 그때의 나는 잠들지 않았다. 그때 거기 머물렀던 나를 그렇게 시퍼런 날을 가지고 긴 밤들을 버텨냈었다. 지금의 나는, 얼마 전까지의 나는, 멀리 두고 온 나를 만나기 전의 나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고 끊임없이 먹어대는 돼지였다. 기억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게워내고 비워내는 존재였다. 미지근한 온기의 의지조차 찾을 수 없는 시체였다.

멀리 두어서, 또 멀리 머물고 있을 오래전 나를 기억해내고는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듯 혼란스럽다. 이젠 어떤 구차한 변명이나 핑계로 설명될 나이가 아닌 것이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가 그 어떤 것도 아닌 나인 것이다.다시 꿈을 꾸기로 한다. 아니, 다시 꿈을 꾸는 것을 꿈꾸기로 한다. 다시 한 번, 빛나기를 소망한다. 아들답게, 시인답게, 남편답게, 아버지답게……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나’답기를 꿈꾸기로 한다.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무언가를 원하고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절실함은 다를 것이다. 절실하고 절박하게 살아내야 할 것이다. 절박…… 절……박…… 글을 쓰고…… 숨을 쉬고……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자고…… 깨고…… 모든 일들이 절실하고 절박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소소한 일상의 창을 열고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눈을 감는다. 머리칼이 흔들리고 세상의 미세한 소음들이 박자를 맞춘다. 바람을 따라 몸이 흔들리고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안정을 찾자 이내, 미소가 지어진다.바뀌는 것은 없다. 다만, 분명 달라질 것이다. 내가 나를 싫어하다 좋아했듯, 내가 나를 잊어버렸다 다시 기억해냈듯. 한동안 창을 열어 놓기로 한다. 멀리 머물고 있을 오래전 나도 나를 기억하기를…….

멀리 떠나 오래 있는 지금의 내가.



김준철 서울 출생. 미국 LA 거주. 1996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가 있다.
현재 미주문인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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