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현수 <세한도> 外 2편

미송 2013. 11. 27. 07:33

       

       

       

       

       

      세한도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나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1992, 등단작

       

            

      슴베라는 말을 배우다

             

      슴베라는 말,
      슴베찌르개를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말,
      사전을 찾으려다 금세 잊어버리는 말,
      큰맘 먹고 사전을 뒤지면
      ,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이라 나오는 말,
      찬란하게 드러난 칼몸이 아니라
      자루 속에 숨어
      칼끝의 궤적을 제어하는 뭉툭한 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
      그 뒤엉킨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말,
      감싸 쥔 신의 손아귀를 얼핏 느끼게 하는 말,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세계라는 걸 일러주는 말,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세계가
      화려하고도 정교한
      칼몸을 춤추게 한다는 걸 가르치는 말,
      거칠고 투박한
      여기가 오히려 숨은 힘이라고
      눈에 빤한 이 세계와
      숨은 차원을 일순간에 바꿔치기 하는 말,
      주눅 들지 말고
      이제 지상에서 살아가라고
      슴베찌르개처럼 가슴에 거칠게 박히는 말.
       

      계간 시와 경계 2009, 여름호

       

            

      얼핏 본다는 것

          

      얼핏 강아지인가
      했더니
      욕실 앞에 뭉쳐진 수건이었다
      얼핏 수건인가 했더니
      느릿느릿 일어나는 강아지였다
      이럴 때마다 흠칫 놀라는 건
      얼핏 본 것이
      진짜 모습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마다 형상이란 건
      무엇과 무엇 사이의 진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깨달음이 아니길 바란다
      사물이란 것은
      수건과 강아지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얼핏 볼 때만 제 모습을 들키면서
      보고 싶은 대로 꼴을 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려 애쓴다
      사물의 둔갑술
      얼핏 본다는 위대한 관법
      이런 말도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가장 견고한 생각만 하기로
      하는데, 머리를 감을 때
      얼핏 누군가 욕실 문 앞에 서 있어
      눈을 닦고 보니
      외발로 서 있는 선풍기였다
      다시 머리 감다가
      얼핏 선풍기이려니 했더니
      코앞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막내였다.

          

      와표현201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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