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2 / 오정자
화장실로 가서 반 쯤 읽은 시집을 서재로 가져 온다. 시집을 만든 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안방이나 정돈된 책상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시집을 읽다니, 괘씸한, 그러지 않을까. 그 볼 일을 보는 중 힐끗 자화상이나 고백록이나 자신의 소중한 가계도를 읽었다 고 하면 기분이 나쁘겠지. 그렇지 그런 말은 본인에게 일러주면 절대로 안 되겠지.
어떤 이유의 만남에서든 시집을 내밀며 싸인을 위해 이쪽 이름을 물어오는 이에게선, 세상과는 좀 떨어진 순수함이 느껴진다. 명함 대신 내밀었다 고 치부하기엔 시집 속 이력이 무겁다.
글자수나 책의 두께와는 별개인 묵직함이 담겨있다. 리폼작가 ××씨와 녹색가게 운영위원 한 분을 만나러 갔었다. 지난 해 연말 재봉틀 두 대를 기증했던 한상철 교수는 처음으로 보낸 나의 문자에 반응이 빨랐다. 물론 사적인 싸인이 아니었으니 당연했을까. 스팀다리미 하날 녹색가게에 기증하려고 한다는 말에, 우리는 얼른 그의 연구실로 달려갔다. 진작 알고 있었지만 시인이기도 한 그의 연구실에는 (얼핏 보아서 잘 모르겠지만) 낡은 레코드판과 전축인가가 바닥에 놓여 있었고, 최근 열었던 사진전 작품 액자(제목이 '나무지문'이었다)들이 책상 앞부분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잽싼 손놀림으로 갈아 준 커피 맛은 진하고 좋았다.
예의상, 받은 시집은 읽어야 한다는 게 또한 나의 철칙이다. 물론 가끔 소설책은 그냥 접어서 간직하기도 하지만, 명색이 삼류시인이라고 (물론 한 교수님께선 콧방귀도 안 뀌는 분위기였지만) 내 입으로 나를 떠들어댔으니, 감정이 오버돼서 시로 여는 세상에서 청탁 받아 편집된 지난 겨울 호의 그의 시를 직접 낭송도 해댔으니, 시집을 한 번 더 들추는 건 예의를 넘어 당근 수순이다.
내 안의 신속한 반응을 위해, 그래서 연 이틀 화장실에 앉을 때마다 열다섯 장씩 읽었는데 지면에 여백이 많아 훌쩍 팔십 쪽까지 넘겼다. 시집의 내용도 구성도 참 도가적 분위기다, 하며 읽었다. 도가적이란 구체적인 뜻도 모른 체 나는 자꾸 도가적이란 말을 쓰고 있다, 요즘.
시치미 / 한 상철
겨울 들판
마른 풀 바람 따라
구름 위로 삭정이 같은 영혼
오르고
산등성이 넘어
하늘로 기러기
날아갔는데
하늘은
모른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대전에서 태어나서 20년째 강원도 치악산 아래 마을 소초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음악을 좋아해서 대학 시절에는 음악다방 디제이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사진도 찍고 있고 중, 고교 교과서 집필에 몇 번 참여한 적은 있지만 시집은 처음이다. <묻지 말아요> 가 처녀시집인가 보다. 뭘 묻지 말아야 할지 난, 잘 모르겠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냥 내버려 둬라 나는 지금 귀차니즘에 빠졌으니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너희가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나는 강물에 뜬 이지가지 어지러운 그림자가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일 뿐이니 떠들지 마라 하는 뜻 같기도 하다. 어떠하든 나의 생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늘도 시치미를 뗀다는 데 뭘 더 알려고 이다지도 애를 쓸 것이냐.
꿈 / 한 상철
밤하늘
잠자다 일어나
아버지 손을 잡고
하얀 별 위를 걸었다
길가 바위 밑에
우산처럼 활짝 핀
관중이 있고
나는 그 아래 앉아 있는데
아버지는 살며시
내 등에 손을 얹고
사는 게 어떠냐고
애들은 잘 있냐고
물으시고는
뭐라고 더 말씀하셨는데
나는 관중 잎 하나를 따서
신발 코에 얹어놓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왠지 눈물 한 방울 떨어져
황급히 감추느라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고개 숙인 채
애들도, 에미도, 어머니도
잘 있다고, 잘 있다고
간신히 말하고
웃었는데
아버지는 말없이 내 등만
토닥였지요
현세를 살고 있다는 것 내세에서 살다 잠시 현세를 다녀간다는 것 모두 ‘꿈’ 같다. 영화 콘택트Contact의 마지막 장면이었던가, 주인공이 오색찬란한 해변의 모퉁이에서 죽은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혹시 다른 영화에서 봤을 수도 있다)은 아직도 뇌리에 유효한 감동이다.
시집 18쪽에 있는 ‘꿈’을 읽으며 아마 도가적 분위기란 말을 떠올렸을까. 차가운 명함 대신 저의 신상에 둘러싸인 가족사는 이렇소, 하는 따뜻한 자기 소갯말처럼 읽혔다. 시집 중간 부분에 기록된 치매 걸린 어머니처럼 천진난만하고 싶단 그의 말에, 소초라는 시골마을의 양지뜨락이 친근히 다가온다.
시집 속에서나 시집 밖에서나 일상적으로 우리는 詩를 만나며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한 (부스럭 부스럭거리는) 모든 소리가 다 詩로 들린다는 사람 옆에서, 당신과 나(you and I) 란 하나의 존재 안에 이름들은 영원한 사랑을 맛보며 살고 있다.
듣는다. 들리는 것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음악뿐이 아니다. 아직 당도하지 않아 미세한 먼지처럼 날리는 중인 당신의 신음까지도 미리 듣고 있는 이 귀는, 반복적인 규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중첩된 도그마를 향해 항시 파괴적인 것들은 자유롭고 가난하다. 샹들리에 휘청거리는 내실 밖, 거리를 떠도는 비렁뱅이들의 음악이며 악기였던 나,
그것은 꿈이었을까,
뚜 뚜 뚜 우우- 신호음이 끊긴다. 침묵이라 말하는 정적과 말줄임표들 사이 상상과 호기심과 기다림 사이, 사이사이에 사는 우린 영원한 불협화음, 미완을 향해 완벽한 노래를 강요하면 재미가 없다. 미완이 강박에 휩싸여 미완을 반복하면, 그것 또한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 재즈의 인생관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와 불협화음과 낙관주의에 있다.
뚝, 끊어지는 침묵과 여백의 공간이 없다면, 자살의 충동 속에서 낙천적으로 흔들 수 있는 자유의지마저 부재한다면, 꽉 쪼이는 진 바지처럼 숨 막히는 전통들만 들이댄다면, 어떻게 사나. 지금 여기가 바로 지옥이요 하고 산다면 몰라도, 최소한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재즈처럼 낙천적으로 흔들 수 있다. 흔든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불협화음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불협화음을 즐긴다는 건 또한 인생을 자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의 시 두 편을 올리고 내 말만 잔뜩 늘어놓았다. 실은 처음부터 재즈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두 편의 이야기를 나눠서 하기는 사실 귀찮고, 그럭저럭 하나로 엮어 끝을 낸다. 재즈 같은가. 남자들은 자기 기분 꼴리는 대로 일이 잘 안되면 (잘 되도 마찬가지) *같네 하지만, 여자들은 그냥 심심하면 재즈 같네!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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