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본 건 2011년 유월이다. 호수라는 닉네임에는 16분 음표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자작나무를 좋아한다 고 말하며 그녀의 집에서 찍은 자작나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처음 들려준 음악은 마이클 호페의 Shadows 였다. 데이비드 달링의 마이너 블루와 비슷한 첼로음. 그해 여름인가 그녀는 집 근처의 호수라며 드넓은 호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처음에 바다인 줄 알았다. 가을에는 또 다시 그녀가 잘 가는 산책로라며 가을숲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 서너 번 쯤 사진을 보여주고 도란도란 뭐라고 내 귓전에 들려주고 하는 사이 내 마음도 열리기 시작하여, 윤영수님이 쓴 <새봄 살구꽃 필 때마다, 박완서 선생님>이란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보여주었다.
그때 그녀는 이국(미국인지 어딘지 잘 기억이 안난다) 땅에 살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아프단 사실을 들려 주었다. 덧붙여 내게 기도해 달라는 말도 했다. 대답은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중보기도에 대한 타성의 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를 잊었다. 처음 보았던 그녀의 자작나무 사진에는 ‘저 자작나무에 매달린 예쁜 새예요’ 하던 문구가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새의 정물은 마음을 슬프게 한다. 이제야 나는 그 예쁜 새를 다시 만져 본다. 나뭇가지 위로 올려놓고 싶어 자꾸만 예쁜 새의 떨구어진 고개를 건드려 본다. 그때 이미 그녀는 말 그대로 ‘매달린 새’였을까. "잔디밭에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한 흙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꼼지락대는 듯한 탄력이 느껴진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식의 귀향)
고인이 된 박완서님을 추모하며 쓴 책에서 내가 그녀에게 보여 준 문장은 몇 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에 앞의 두 문장을 그녀는 좋다고 전했다. 이국땅에선 책 한권 우리말로 쓰인 문장 하나가 너무 소중하게 닿는다고 말하며 그녀는 기뻐했다. 자기 마음을 다 들킨 거 같아 눈물이 글썽인다고 말했다.
호수와 마이클 호페의 첼로음과 강원도 바람에 살갗이 더 하얘진 자작나무를 보면 나는 그녀의 침착했던 배려가 떠오를 것 같다. 그녀가 보여 준 여름 호수 앞에서 오수를 즐기며 꿈같은 시를 썼던 한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보여 준 가을 산책로에 갈잎이 뒹굴고 오늘은 눈이 내릴지라도 오월의 파피꽃을 볼 때면 그녀를 다시 사랑할 것이다. 가장 예뻤고 가장 순결했던 나의 신부여, 주님이 품에 안고서 입 맞추고 있을 그녀의 이마를 만져본다. 이 순간, 자작나무 사이를 날고 있는 새를 위해 기도한다.
20140112-20150519<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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