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묘지1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묘지』(민음사, 1996년)
조정권은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 영어교육과 졸업했다. 197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신성한 숲』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산정 즉 산꼭대기는 험하고 가파르고 추운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가파른 산정보다 따뜻한 평지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산을 내려와 도시에 모여 삽니다. 영혼의 평안보다는 육신의 평안을 더 원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어붙은 폭포”가 단호하게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빛나는 정신을 발견합니다. 신이 거주하는 천상의 일각도 추운 곳일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늘 육신의 편안함만을 바라지만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어떤 날은 헌 누더기가 된 육신을 끌고 가파른 산정으로 우리의 정신을 이끌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도종환>
신성스러운 불면
宿天臺桐栢觀*
(천대산 동백암에서 밤을 지새다)
이슥토록 밤비가 푸른 나뭇잎에 타이핑 하고 있다
잣나무 가지의 푸른 가시를 끌어와
손끝으로 읽는 마른 껍질의 점자(點字)
빗방울이 타이핑하는 문자가 하얗다
근처에 싸인 어둠을 촉수 끝에 모으면서
고요 속에서 은 스픈 부딪듯 찰랑대면서
더 혼자 많이 있는 시간한테
아무 것도 아닌 오늘의 소박함을 알게 해주시는 시간
밤이 주는 휘황찬란한 축복은
불면
불면이야말로 내 안에서 살아왔던 산타크로스
김 추기경도 말년을 불면 속에서 살았듯이
(신은 인간에게 불면을 주셨다)
마음이 혼자 기댈 곳 없는
자신에게마저도 기댈 수 없는 시간을 계속
더 주신다면
가는 날이
하루하루 기다려지는
크리스마스이브날만 같다면
구멍 난 양말 신은 채 잠든 마음들 찾아가
내가 덮고 살았던 담요짝 덮어주고
조용히 옆에 같이 있다가
있었던 모습으로라도 갈 수 있다면.
* 맹호연의 시 제목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다 / 손홍규
-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열린책들, 2010)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방에서 보낸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나를 찾는 이도 없어서다. 책상 앞에 앉으면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는다. 고개를 들면 방이 훤히 보여서이고 그러면 답답해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 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건 마치 평소에는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던 평행우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낯설고 기이하지만 분명 내가 머문 시공간에 겹쳐진 또 다른 세계. 다른 세계를 방문하는데 어찌 상처가 없을까. 경계를 넘어서는데 어찌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 방식으로 나는 1973년 9월 11일의 칠레 대통령궁에 들어섰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라디오 방송 직후 투항을 권유하는 쿠데타 세력 측의 최후 방송이 들려오던 순간으로. 살바도르 아옌데 곁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있었고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그의 조카딸 이사벨 아옌데 역시 대통령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블로 네루다는 병석에서 혼미한 정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으며 그리고 또 한 사내 그 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던 청년 로베르토 볼라뇨가 칠레에 있었다. 청소년 시절 멕시코로 건너가자마자 그 곳에서 틀라텔롤코 광장의 대학살을 목격한 볼라뇨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조국에서 독재자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이 독재자 피노체트는 학살에 관해서만큼은 전두환조차 이등병 취급을 해도 좋을 만큼 능란하고 무자비한 자였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투항을 거부하고 대통령 궁에서 최후를 맞이한 뒤 파블로 네루다 역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리엘 도르프만과 이사벨 아옌데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콘셉시온 근처에서 체포 투옥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한 볼라뇨는 멕시코로 돌아갔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죽음은 칠레의 죽음이었고 칠레 혁명 정신의 죽음이었다. 산 자들 역시 죽거나 망명하거나 도망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문학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문학은 냉정하고 잔인하다.
밤이 되면 더욱 그렇다. 창문을 열면 밤이 내 작은 방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창문을 닫으면 밤 속에 고립된다. 나는 밤에 포위된 채 헛된 고뇌를 되풀이한다. 문학 말고 다른 가능성이 없는 시각, 밤은 우울하다. 스물한 살의 볼라뇨가 지새웠을 밤들을 생각해 본다. 그가 어느 침대에서 유쾌하게 잠들 수 있었을까. 대통령 궁에서 최후를 맞이한 살바도르 아옌데가 맞이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은 볼라뇨의 삶에서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스물한 살의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고 만난 적 없지만 매일 밤마다 도청에서 최후의 진압을 기다리던 광주 시민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둠을 만났듯이, 밤은 되풀이된다. 『칠레의 밤』은 그 수많은 밤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의 미덕을 무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소설 전체에 걸쳐 매순간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에피파니를 그것이라 해도 상관없고, 피노체트에 기생했던 한 가톨릭 사제의 고백이므로 상황적 아이러니를 그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칠레의 밤』은 밤의 기록이다. 누구도 완벽하게 기록하지 못했던 불면의 시간이면서 누구나 겪어야 했던 암흑의 시간이었던 밤이 볼라뇨의 소설에서는 환하게 켜진다. 밤을 낮으로 이주시키기. 대낮에 목격하는 밤은 얼마나 남루한가.
지하실에서 고문이 자행되는 동안 위층 살롱에서는 칠레의 문학인들이 모여 파티를 벌인다. 화장실을 찾아 살롱을 나섰던 누군가 그 집에서 길을 잃어 우연히 지하실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지하실을 나가 얌전하게 문을 닫는다. 하지만 그는 지하실을 목격하기 이전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 칠레가 피노체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우리가 전두환 혹은 박정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콘셉시온에서 쿠데타 세력에 붙잡혀 여드레 동안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어두운 감방에서 직시했던 볼라뇨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다. 그 침묵이 종교와 문학으로 윤색되고 변호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 칠레에서는 가톨릭이 했던 일을 한국에서는 개신교가 했다. 칠레에서는 우루티아가 했던 일을 한국에서는 작가들이 했다. “그녀는 그 저주받은 집에 다시 홀로 남게 되는 것이 갑자기 두려운 듯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손을 꽉 쥐어 주고 기도하라고 권했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내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도했답니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기도하세요, 마리아. 기도하세요, 자식들을 위해서요. 그녀는 산티아고 교외의 공기, 석양의 정수인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조용하고 차분하고 나름 용감하게 주변을 응시했다. 자기 집, 예전에 차를 주차하던 장소인 현관, 붉은색 자전거, 나무, 흙길, 울타리, 내가 열어 놓은 것 외에는 죄다 닫혀 있는 유리창, 저 멀리 깜빡거리는 별들을 보았다. 그리고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집을 떠났다. 산티아고로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그렇다. 문학은 이렇게 한다. 한국의 작가들은 살롱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 그 아래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우리는 이미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므로.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비열한 출세주의자이면서 저명한 문학평론가이고 피노체트의 하수인이면서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우루티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볼라뇨를. 그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글쓰기란 그토록 무서운 타인으로 살기다. 결코 살고 싶지 않은 타인이 되어 타인으로 살아 보기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또다시 냉정하고 잔인하다.
창 밖의 어둠은 한층 두터워졌고 나는 습관처럼 이런 잠언을 떠올린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우리니. 그러나 새벽은 매번 가까워졌다가 매번 되돌아갔다. 마찬가지로 밤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앞으로 내가 견뎌야 할 밤들 역시 무자비할 것이다. 시대의 전위가 되고 싶은 작가적 욕망은 비난받을 필요가 없으나 너무 앞서 달려갈 필요도 없다. 추억이 없는 자는 오래 견디지 못하므로 한번쯤 무릎을 꿇고 발아래 귀를 대어 볼 일이다. 저 지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가 바로 비참했던 한국의 밤들일 테다. ― 문학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거다.
《문장웹진 2월호》
퇴근길에 정보관 열람실에 앉아 계간 현대시학을 훑어보았다. 조정권 시인의 <은둔지>란 시가 검색되지 않아, 신성한 불면을 읽었다. 맘먹으면 5분 안에 잠드는 내가 이리저리 잠을 물리치며 읽는 손홍규. 그의 글이 시들과 어떻게 관계맺음을 할지 모르겠으나 잠 들기전 잠시 안도감을 맛본다. 2011-02-12
절벽에 지은 집에서 병고를 견디며 한 겨울을 지내 본 사람은 골바람 속 가랑잎 구르는 소리와 창호지에 비친 달빛의 따스함을 만났을까. 신이 거주하는 천상 누각에서의 일각을 그리워하는 우리는, 육신은, 가녀린 이파리 한 장. 2014-03-22
문자들은 나의 수면제. 어젯밤 페이스를 열어 무작위로 문자들을 읽다가 산정묘지, 아 언젠가 읽었던 거 같네 하는 기억에 재검색한다. 돌고 도는 게 돈 뿐이겠나. 202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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