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Wislawa Szymborska,『제목이 없을 수도』

미송 2023. 12. 12. 12:14

 

어쩌다 보니 이 화창한 아침,

어느 한적한 강가의 나무 그늘 아래 이렇게 앉아 있다.

이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동기가 무엇인지 낱낱이 분석되어져야 할

중요한 전투나 조약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폭군의 화살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 강변에 앉아 있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도달했다는 건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갑판에 오르기 앞서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지의 여러 곳에서 지냈으리라.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기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

사령관의 망원경에 포착된 풍경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자신만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수년 전에 뿌리를 내린 포플러나무.

이 강은 오늘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유유히 흐르던 라바 강.

관목 사이 저 오솔길을 누군가가 밟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름을 뿔뿔이 흩어놓기 위해

바람은 한발 앞서 구름을 여기까지 싣고 왔으리라.

 

비록 주변에서 거창한 사건은 일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세부적인 항목들이 빈곤해진 건 아닐 테니.

민족의 대이동이 세상을 덮쳤을 때보다

그저 조금 덜 그럴싸할 뿐,

그저 조금 덜 명확할 뿐,

 

침묵이 꼭 비밀 조약에만 수반되는 것도 아니고,

원인과 그 일행이 항상 성대한 대관식에만 참석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의 기념일만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강가의 조약돌 역시 구르고 또 구른다.

 

환경이 수놓은 자수는 복잡하고 견고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개미의 바느질 한 땀,

대지 위에 꿰매진 잔디,

나뭇가지로 뜨개질한 파도의 문양.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강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위로 하얀 나비가 오직 자신만의 것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손에 그림자를 남긴 채 포드닥 날아간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인

그림자를 남긴 채.

 

이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더 이상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쉼보르스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강가를 거니는 어린아이 기분이 든다. 속엣 것을 꺼내놓지 않아도, 말 안하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위로를 얻게되는 일은 아름답다.  예쁜 조약돌을 고르듯폴짝폴짝 나비를 쫓듯, 미지의 누군가에게 들려줄 언어를 찾아 다녔을 그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비유들과 원근법을 사용한 인생 풍경들을 바라보노라면,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20171206-20221224 <>     

 

 

어쩌다 보니 무시무종을 이야기 하게 되고, 어쩌다 보니 홀로그램처럼 깨춤을 추던 내 그림자를 보게 되고, 어쩌다 보니 보물처럼 여겼던 것들이 평범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어쩌다 보니 교만과 비천하다 여기는 마음이 동일한 망념임을 알게 되고,  어쩌다 보니 로 운을 떼자, 오늘을 몽돌처럼 하얀 나비처럼 작고도 어여쁜 노랫말로 쌓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여.  20231204<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