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적지를 등지고 앉아보오
풍경과 멀어질 뿐 이별은 없소
죽음 같소
등지고 살아보나
결국 등지고 달려가는
아하, 내가 아닌
풍경이 이제 나를 밀어내오
그동안 순방향에 퍽 섭섭했나 보오
등지고 가면 등 뒤 사람이 내 앞
내 앞사람이 내 뒤
역방향이 운명인 백미러여
너의 추억은 앞에 있구나
2.
건강을 위해 뒤로 걷는 것처럼
이것도 무슨 운동이 좀 될 성도 싶소
여보, 당신들이 내 뒤
아니 내 앞에 있었던 풍경들이요
내 그대들 맞아주지 않았어도
나를 향해 달려왔구랴
멈춰 서서 달려오는구랴
기실 우리 삶도 등의 힘으로
앞으로 가는 것 아니요
연필처럼 뒷걸음치며
살아내는
아하, 뒤 꽁지에 달린
죽음이라는 지우개는 참 유효하오
열차여 목적지는 아직 멀었는가
3.
순방향에 비해 요금이 저렴한 까닭은 무엇이오
풍경을 가불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오
뒤로 달려가던 풍경들이
냅다 앞으로 물러나는구랴
출발지를 앞에다 두고 멀어짐에도 묘한 매력이 있소
어쨌든 승객들 반반이 마주 보고 앉은 장면에
데칼코마니 같은 박수를 보내보오
아하, 우리를 위해
달도 태양도
밝은 얼굴 우리 쪽 향하려
순방향과 역방향을 반복하며
긴긴 주행을 하고 있었구랴
— 함민복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작가들》 가을호)
유머 감각에, 상식에서 병리를 찾아내는 일에 이상은 과연 천재적이었다. 그는 거울을 시로 써서 현대인의 자아 분열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돌이켜 보면 이런 시였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 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
이상은 멋진 빌딩을 보고도 그 멋진 외관의 디테일 대신 그 속에 숨은 콘크리트와 쇄사를 꿰뚫어 보았던 시인이다. 그는 거울 속에서 자기 안에 감춰진 또 다른 존재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함민복 시인은 KTX 역방향 좌석 타기라는 단순한 경험에서 이상의 거울 경험을 떠올려냈고, 이를 오마주 삼아 그 목소리를 빌려 현대판 ‘역반사’의 인생론을 펼쳐냈다.
이 시가 1, 2, 3이라는 연번을 가진 만큼이나 여기 녹아 있는 인생론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비평이 그 수준을 깊이 따지는 일은 위험하다.(김경주라는 시인은 비평가가 어찌나 싫었는지 무슨 스푼인지 숟가락인지를 시인인 자신이 먼저 발견해 놓으니 비평가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설명해 놓다더라는 등등의, 썩 좋지 못한 비평가론을 시로 써내기도 했다. 요즘 비평의 퇴락이 어떠한지 알 만하다.)
“목적지를 등지고 앉아보오/ 풍경과 멀어질 뿐 이별은 없소/ 죽음 같소”라는 첫 구절이 멋지다. 벌써 죽음을 현실로 감지해야 하는 경륜, 기차 여행은 인생길과 같고, 역방향 여행은 더욱 인생의 숨겨진 사연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 시인이 말하듯 출발지를 바라보며 멀어져간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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