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미송 2014. 11. 29. 01:22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과같이

서로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서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과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죽은 자의 목소리에 솔깃해지는 일, 스스로의 귀를 당겨 곁에 두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 일, 이상하지 라고 자꾸만 속닥대며 은근히 겁주는 일, 이것은 새벽 한 시의 정령들이 인간을 혼미로 이끄는 꼬드김의 수법이다. 게슴츠레한 눈에 별안간 힘이 들어간 어떤 이의 심장 같은 붉은 이야기다. 붉은 걸 푸르다, 안개에 싸인 걸 투명하다, 밀착을 통과한다, 말하는 청개구리 화법의 묘기, 이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무섭도록 신비해서 널 끝까지 읽을 수 있겠다, 이다그저 어느 날 저녁 풍경일 뿐이지만 그 푸른 빛을 감상하는 동공이 순간 원근법을 쓰게 되는 건 또 다른 신비한 일. 어쨌든 멀고도 가까운 삶, 그리고 신비한 예감, 습관처럼 통과하는 검은 외투의 사람들. 바닥. 거울. 거울 속 얼굴. 얼굴. 또 다른 얼굴. 또 같은 거울. 거울 속 얼. 바닥. 또 같은 거울. 거울 속 얼굴푸르다 차갑다 싸늘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볼까, 누워 볼까, 조용히 눈 감아 볼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