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으로 가는 꿈 / 박형준
소 잔등에 올라탄 소년이
뿔을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땅거미 지는
들녘.
소가 머리를 한번 흔들어
소년을 깨우려 한다.
수숫대 끝에 매달린 소 울음소리
어둠이 꽉 찬 들녘이 맑다.
마을에 들어서면
소년이 사는 옴팍집은
불빛이 깊다.
소는 소년의 숨결을 따라
별들이 뜨고 지는 계절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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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십우도(十牛圖)에는 소 잔등에 올라타 피리를 부는 소년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시를 불교적인 깨달음을 노래한 시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그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소 잔등 위에서 깜빡 잠이 든 목동을 그린 한 편의 소박한 수묵담채화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년의 숨결을 따라 별들이 뜨고 지는 계절로 돌아오는” 꿈속, 소와 소년의 교감이 여백으로 다가오는 차분하고 동양적인 분위기가 일품이네요. “맑다”는 단어 하나면 이 시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시인 최형심>
묵화 墨畵 /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소 / 김종삼
네 커다란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 내가 있다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긋이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고나.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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