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성복 <샘가에서>

미송 2014. 12. 14. 08:36

 

 

 

 

 

샘가에서 / 이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는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출처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이성복 :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77년『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남해 금산』『그 여름의 끝』『호랑가시나무의 기억』『아, 입이 없는 것들』『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아주 오래 전 당신과 스치는 순간 저는 흐르기 시작했었지요. 물이 샘에서 흘러나오듯 누군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하는 것, 그 감정의 시작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줄기를 어긋나게 만들고 그 원천에서 멀어지게 만들어버리지요.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적실 수 없는 곳을 흘러가지만, 이제야 비로소 당신을 흐르지 않는 중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원망도 그리움도 없이 멀리서 빛날 당신을 위해 더 어두워지고 더럽혀지는 일, 그 또한 어찌 사랑이 아니라 말하겠습니까. 샘가에서 시인이 길어올린 한 두레박 아름다운 시를 당신께 보냅니다. (나희덕 시인)

 

누군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 마음의 물길은 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 원천에서 멀어지게 되지요. 너무 멀리 와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적실 수 없을 때, 우리는 “서러움의 골을 깊이 파며” 그 사람을 흐르지 않는 중심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매일 그 샘가에 가서 까마득한 속을 들여다보아야 하지요. 아마도 사랑은 천형인가 봅니다. (최형심 시인) 

 

 

우리가 어느 한 때인가, 아니 바로 이 순간에영혼 없는 사람들 숲을 헤매인다 느낄지라도. 그리하여 한없는 괴로움과 고통 속을 거닌다 생각할 때라도. 신이시여 우리의 영혼이 도매급으로 팔려 나가지 않도록 보호해 주소서. 세파의 한가운데 서 있어 비록 쓸쓸할지라도, 내 흔들림의 출발과 목적지가 한 샘터였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소서. 새로운 적을 만들지 않게 하시고, 오래되어 곰삭아버린 벗들의 향기와 익사할 만큼 깊었던 가슴 호수와 그 길의 표지판들을 몰라라 하지 않게 하소서. 따스한 평온 사나운 광풍 가여운 이웃 모질은 사랑, 이 모두가 내 안에 샘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부디 우리 아름답게 수놓인 길로 접어드는 물줄기이게 하소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