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게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 시_ 최승자 - 1952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으며,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등이 있음.
제가 아는 연애시들 중 가장 처연한 시입니다. 바스러진 벚꽃들이 바람에 쓸려 사라져버린 나무 밑에서 이 시를 읊조립니다. 어투는 발랄하지만 이 발랄함은 ‘저무는 산 그림자’의 길고 고적한 쓸쓸함을 품고 있습니다. 봄에는 누구나 연애하고 싶어 달뜹니다. 연애하고 싶어 달뜨는 이 뜨거운 마음은 생의 불연속성에 대한 우리 나름의 안간힘이기도 할 겁니다. 피해갈 수 없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 있어 우리는 더욱 달뜹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열렬해집니다. 사랑의 숙명이면서 존재의 숙명이기도 한 불연속하는 생의 마디를 시인은 이렇게 이어놓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라도 뭇별들 사이에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 드리겠노라’고. 아, 오늘의 사랑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김선우 시인>
눈으로 읽기만 해도 좋은 시들이 메일박스 안에서 밀려나온다. 최근 근황은 어떠할까 궁금하던 차에 최승자 시인을 조명해 주는 목소리를 듣는다. 30대 때 흥얼거렸던 박진영의 청혼가와도 비스무레한 싯구들. 그대가 나와 결혼을 해준다면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어도 좋아~ 하던 사랑가 닮은 시. 근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 20110516 <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누군가를 땅에 묻고 와서도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합니다. 화려한 수사법을 거느리지 않고도 최승자 시인의 시가 우리를 울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속에 삶의 냉엄한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끝나면 우리는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온몸으로 아파하며 상실을 완성해가야 합니다. <최형심 시인>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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