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달려라 도둑 / 이상국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들키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 글쎄 서울 작은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냐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정신이 아니다.
-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라고 거드는 피아노교습소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가 이랬다.
-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 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츄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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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속터미널에 갔더니 구세군 냄비가 나타났더군요. 딸랑딸랑 종소리를 들으니 이제 정말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은 소외된 이웃에게 눈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너무 큰 뉴스들이 뻥뻥 터지는 바람에 따스한 뉴스를 만날 수 없네요. 그래서 오늘은 이웃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를 한 편 골랐습니다. 친척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명절날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을 잡으러 거리로 나왔던 사람들은 오죽 사정이 딱했으면 그랬겠냐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슬슬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둑의 발자국을 발견한 시인도 “달려라 도둑”이라고 속으로 응원하지요. 지금 범죄자를 옹호하는 거냐고 도덕적으로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지만, 제2, 제3의 장발장으로 가득한 감옥을 만드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인 최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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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녹색가게로 꾸준히 자원봉사를 나오는 중2 여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열다섯 살적에 난 어땠었지 하고 떠올리자면, 그 아인 나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숙합니다. 현재의 내 수준도 어디쯤일까 가늠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아인 오십 줄인 나 같은 사람과도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그런 존재입니다. 한편으론 놀랍고 또 한편으론 즐거운 일이겠죠. 어제 그 아이가 대화 도중에 세상이 3~4년 전보다 더 각박해졌어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그녀의 5학년쯤으로 얼른 시계를 돌려 보려던 순간, 반사적으로 저는 콧방귀를 흘렸습니다. 얘, 세상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미 각박해져 있었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쌩하니 뱉어낸 어른의 말이 이내 부끄러웠습니다. 아이의 고백이 오히려 측은해야 할 터인데, 타성에 젖은 어른다운 언어들이 얄미웠습니다. 그 무엇이 아무리 그렇다 한들, 한번 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마음 한 자락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우뚝 올라서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은 나락에 떨어져 있겠구나 하는 마음. 내가 편안히 웃고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은 어딘가에 숨어 울고 있겠구나 하는 마음. 그런 마음 씀씀이로 이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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