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미송 2022. 10. 21. 12:54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2009년 1월 원주로 이사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갔던 집.  그녀의 유고시집을 읽은 건 삼월이었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그녀. 주방에 놓인  골드스타 냉장고를 보며 생활인이기도 했을 그녀를 생각했다. 만사가 강물처럼 흘러갈 뿐이라는 걸 예감하던 그 때,

 

창비 S의 표절사건을 접하기도 했다.

 

1966년 친일문학론을 썼던 임종국 선생은 반민족 문학인들을 목숨 걸고 고발했는데, 그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난 문단에 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듣던 그 무렵.

 

이완용 비서였던 소설가가 한국문학사에 남겨질 최초의 소설가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친일문인의 대명사 춘원 이광수니 서정주니 김동인 그 이름을 파는, 아직도 독자를 봉으로 알고 있는 출판계, 언론, 문단은 식민지의 잔재라고, 36년 식민지 잔재가 곳곳에 만연한 건 일제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라고...

 

그녀가 떠나간 후 세상은 좀 달라졌는가. 달라진 건 없다. 살벌해지고 있을 뿐이다. 

 

메르스 감염 가능성이 확인된 종사자는 자진 신고하고 반드시 중앙지원단에 알려 달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홀로 집에도 가능하지 않은 직업환경. 맞벌이에 시달리는 부모들 대신 아이들 속으로 달려가야 하는 사람은 아무때나 아프면 안 된다. 그야말로 여, 전, 히, 살아내고 있는 21세기. <오>  

 

20150615-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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