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경록,『빈혈』

미송 2022. 11. 11. 11:35

 

밤이 되면 내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갑니다

피는 어디로 가나

피는 공중으로 공중으로 흘러서 하늘로 갑니다

하늘나라, 피가 가는 그곳은 언제나 내 죽음의 집입니다

피가 빠진 몸은 홀로 꿈을 꾸다가

차게 굳어서 흑연이 됩니다

별이 된 몸

별의 꿈

별이 눈물을 흘립니다

내 피는 바다에서 별이 됩니다.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국사 종점 조금 못 미쳐 우정의 동상앞에 내리면 그 작은 동산 길가엔 젊은 시인의 시비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시비는 77년 4월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작고한 이경록 시인의 시비다. 경주를 찾고 불국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그러한 시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직은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그를 찾아올 뿐이다.

 

이경록 시인이 죽음의 언저리를 헤매던 겨울밤, 그는 의사들로부터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흑성동 성모병원 가까운 어느 소주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또 몇 명의 친구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자정이 넘었을 때 갑자기 그의 숨결이 가팔랐다. 동쪽으로 창이 난 그의 병실로 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갔다. 곧이어 수녀 몇 분이 들이닥쳤다. 수녀들은 그에게 종부성사를 주기 위해 손에 작은 성수병을 들고 있었다.

 

"이경록씨, 이제 하느님 곁에 가시는 거예요. 하느님 곁에 가시려면 영세를 받아야만 해요. 받으시겠죠?" 수녀들은 그에게 종부성사를 받기를 권했다. 천주교인이 아니었던 그로서는 뜻밖의 권고였다. 그러나 그는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에서도 머리를 끄덕이며 성사를 받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면 이름을 요셉이라고 하세요. 영세를 받으려면 영세명이 있어야 해요." 수녀 한 분이 그에게 요셉이라는 영세명을 정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흔들며 종부성사 받기를 거부했다. 말 한 마디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내가 시인인데, 이경록이라는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시인인 줄 알지, 요셉이라고 하면 아무도 내가 시인인지 모른다."는 뜻의 말을 띄엄띄엄 토해 놓았다. 그러면서 손바닥에다 수녀들이 자기의 말뜻을 잘 못 알아들을까봐 '시인'이라고 손가락 글씨를 써 보였다. 수녀들은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요셉이라고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시인인 줄 다 알아요. 요셉이라 한다고 해서 이경록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종부성사를 받겠다는 표시를 했다. 곧이어 그에게 성수가 뿌려지고 종부성사를 위한 수녀들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날 밤, 종부성사를 받고도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다들 한없이 기뻐했다. 그는 곧 퇴원을 하고 대학졸업식에도 참석했다. 연작시 '겨울바다'를 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산 해운대도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결국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빈혈'이라는 마지막 한 편의 시를 남긴 채. <정호승>

 

 

 

혹시 빈혈이라는 제목의 시도 있을까, 찾아보았다. 그런데 시 잘 쓰는 시인 이경록의 빈혈이라니. 천상 시인이야, 할 때의 그 천상이 내가 생각한 천상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는 오늘도 하늘 위에서 시를 쓰고 있을 것 같다. 어지럼증으로 응급실에 다녀온 후, 처음으로 빈혈약을 처방받았다. 어지럽던 순간 이렇게 죽는거구나 하던 그 죽음의 맛. 시인이 말한 끝없는 죽음은 그와 사뭇 다르겠지만.  마지막 슬픈 이야기. 시인이란 이름에 참 어울리는 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오>

 

20171201-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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